박대성 원불교대학원대학교 교수(원불교 교무, 명상ㆍ상담전문가) |
선을 통한 마음공부의 ‘빠른’ 지름길은 역설적으로 ‘오래오래 계속’하는 것이다. 명상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의 경우 주위에 단기간에 깨달음이나 견성(見性)을 체험시켜 준다고 홍보하면서 비싼 수련비를 받는 일부 수행단체를 더러 볼 수 있다. 이런 곳에서 수행할 경우 심리적으로 구조화된 프로그램을 통해 종종 신비한 현상을 빨리 느낄 수도 있다. 마음에 기쁨이 차올라 세상을 다 얻은 듯한 자만심이 마음속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며칠 만에 그 기운이 풀어지거나 극단에 가서는 오히려 정신적, 육체적 후유증을 얻는 경우도 있다. 지속적인 치료 없이 단방약(單方藥)만으로 병의 뿌리를 뽑기 어려운 것과 같다.
마음을 닦는 데 있어서 체험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다. 다만, 강렬한 체험일수록 그것에 대한 집착을 놓아버리기가 힘들다. 필자의 경우에는 원불교 교무가 되기 위해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에 재학 중, 방학이 되면 배낭에 간단한 생필품과 좌복을 챙겨 산장이나 민박에 들어가 수차례 용맹정진을 통해 마음의 힘을 길렀다.
명상으로 깊은 삼매에 들게 되면 우주와 합일하는 체험으로 어떻게 시간이 가는 줄을 몰랐다. 어느 때는 석가모니가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무수한 마구니와 대적해 승리했다는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의 모습을 나 역시 눈에 환한 영상으로 경험하기도 했다. 때로는 좌선 중에 당시 수행 정도를 가늠해주는 문구가 눈앞에서 완연히 떠오르기도 했으며, 원불교를 창시한 소태산 대종사가 직접 나타나 나를 안아주고 격려한 뒤 사라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마음공부를 통해 심력이 길러지는 증거와 큰 체험은 됐지만, 공부를 성장시켜 주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 체험에 대한 집착이 고비가 돼 몇 년간 발목을 잡기까지 했다.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는 각오의 대적공(大積功)을 통해 겨우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한고비를 넘기 위해서는 내 작은 손에 쥐어진 체험에 대한 집착을 놓아버려야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특정한 수행이나 공부법을 통해 어떠한 체험을 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오래 했냐는 것만으로 자신의 공부를 과신하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일이다. 이는 현실 세계에서 ‘자신의 집이 얼마짜리’며, ‘자신의 차가 얼마짜리’라고 자랑하는 졸부의 그것과 다름이 없는 꼴입니다. 영적(靈的)인 우회로를 이용해 자신의 내면세계 허기를 면하려는 정신적 허영에 불과하다.
이런 사람들은 스승의 지도를 기피하거나, 문답 감정을 하며 화두나 성품의 이치에 대한 견해를 보여주길 청하면 꿀 먹은 벙어리가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일상생활이나 인간관계 등이 오히려 미숙한 경우도 많다.
자아(ego)의 고집을 내려놓고 하루 중에 활용할 수 있는 짧은 시간이라도 지속해서 명상에 투자한다면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이 시간과 장소를 뛰어넘어 무한한 마음의 세계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그때 솟아나는 즐거움은 물질에서 오는 유한한 기쁨이 아닌 영원한 마음의 기쁨으로 함께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