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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슬기로운 명상생활] 일단 앉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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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명상생활] 일단 앉으라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21/02/09 13:40 수정 2021.02.09 01:40

↑↑ 박대성 원불교대학원대학교 교수(원불교 교무, 명상ㆍ상담전문가)
ⓒ 양산시민신문

선가(禪家)에 ‘지관타좌(只管打坐)’란 용어가 있다. ‘오직 앉아 있을 뿐’이라는 의미가 있다. 화두를 참구하는 것으로, 수행을 삼는 간화선(看話禪)과 달리 묵묵히 본성을 관조하는 것을 중심으로 하는 묵조선(黙照禪)에서 중요시하는 개념이다.

‘묵조’는 이름 그대로 앉아서 특정한 대상을 관찰한다든가 화두에 집중하는 것이 아닌 묵묵히 앉아 있는 행위 그 자체를 중요한 것으로 봤다. 인간은 본래 불성(佛性)을 갖추고 있기에 억지로 부처를 구하는 좌선을 조작이며 허위로 봤다. 그러므로 앉아 있는 것 그 자체가 부처의 행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묵묵하게 관조하는 것을 주업으로 하는 공부인들은 오직 앉아서 몸과 마음이 만나는 한 점(點)인 단전에 집중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한국에서는 치열한 화두 참구(參究)를 중요시하는 간화선이 선가의 가풍으로 자리를 잡았지만, 이웃 일본에서 가장 큰 규모를 가진 선종의 일파는 묵조선을 닦는 조동종이다. 이 두 수행법은 서로 비판하고 견제하면서도 양대 문중으로 자리 잡아 지금까지도 천하 선객들에게 정신적 연원(淵源)이 되고 있다. 원불교는 이 둘을 배척하지 않고 묵조의 지관타좌를 단전주(丹田住)의 좌선으로, 간화의 화두참구를 의두성리(疑頭性理)로 창조적으로 계승해 동시에 닦게 한다.

묵조든 간화든 단전주든 앉아서 닦는 좌선(坐禪)을 기본적인 수행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왜 하필 ‘앉아서’ 명상을 하는 것인가? 기왕이면 누워서 하면 더 편하고 좋지 않을까. 우리는 달리다 힘들면 걷고(行) 싶고, 걷다 힘들면 서고(住) 싶고, 서 있다 힘들면 앉고(坐) 싶고, 앉는 것도 힘들면 눕고(臥) 싶고, 눕다 보면 잠이 온다.

그 가운데에서 중간에 위치한 동작이 바로 ‘앉는 것’이다. 눕는 것보다는 집중이 잘되고 불편하지만, 걷거나 뛰는 것보다는 고요하고 편안해 중도에 맞는 동작이 바로 좌식(坐式)이다. 그래서 우선 명상은 잘 앉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행위와 목적을 둘로 보는 관점에서 좌선이 행위라면 성불은 목적이 된다. 그러나 지관타좌 입장에서는 앉는 행위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있다. 이 행위 하나에 대가를 사량 계교하지 않고 전심전력하게 된다면 목적은 따로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이 ‘오직 앉을 뿐’의 미덕이다.

그러므로 송나라의 유명한 선사(禪師)였던 몽산 덕이(1231~1308)는 그의 ‘휴휴암좌선문’에서는 “대범 좌선이라 하는 것은 모름지기 지선의 자리에 사무쳐서 마땅히 스스로 성성하게 하는 것”이라고 한 것이며, 원불교의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그 도만 밝히고 그 공을 계교하지 아니하면 큰 공이 온다(‘대종경’ 인도품 7장)”고 하신 것이다. 그러니 여러분, 명상하고 싶다면 지금 그 자리에 그저 잠자코 앉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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