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조’는 이름 그대로 앉아서 특정한 대상을 관찰한다든가 화두에 집중하는 것이 아닌 묵묵히 앉아 있는 행위 그 자체를 중요한 것으로 봤다. 인간은 본래 불성(佛性)을 갖추고 있기에 억지로 부처를 구하는 좌선을 조작이며 허위로 봤다. 그러므로 앉아 있는 것 그 자체가 부처의 행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묵묵하게 관조하는 것을 주업으로 하는 공부인들은 오직 앉아서 몸과 마음이 만나는 한 점(點)인 단전에 집중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한국에서는 치열한 화두 참구(參究)를 중요시하는 간화선이 선가의 가풍으로 자리를 잡았지만, 이웃 일본에서 가장 큰 규모를 가진 선종의 일파는 묵조선을 닦는 조동종이다. 이 두 수행법은 서로 비판하고 견제하면서도 양대 문중으로 자리 잡아 지금까지도 천하 선객들에게 정신적 연원(淵源)이 되고 있다. 원불교는 이 둘을 배척하지 않고 묵조의 지관타좌를 단전주(丹田住)의 좌선으로, 간화의 화두참구를 의두성리(疑頭性理)로 창조적으로 계승해 동시에 닦게 한다.
묵조든 간화든 단전주든 앉아서 닦는 좌선(坐禪)을 기본적인 수행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왜 하필 ‘앉아서’ 명상을 하는 것인가? 기왕이면 누워서 하면 더 편하고 좋지 않을까. 우리는 달리다 힘들면 걷고(行) 싶고, 걷다 힘들면 서고(住) 싶고, 서 있다 힘들면 앉고(坐) 싶고, 앉는 것도 힘들면 눕고(臥) 싶고, 눕다 보면 잠이 온다.
그 가운데에서 중간에 위치한 동작이 바로 ‘앉는 것’이다. 눕는 것보다는 집중이 잘되고 불편하지만, 걷거나 뛰는 것보다는 고요하고 편안해 중도에 맞는 동작이 바로 좌식(坐式)이다. 그래서 우선 명상은 잘 앉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행위와 목적을 둘로 보는 관점에서 좌선이 행위라면 성불은 목적이 된다. 그러나 지관타좌 입장에서는 앉는 행위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있다. 이 행위 하나에 대가를 사량 계교하지 않고 전심전력하게 된다면 목적은 따로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이 ‘오직 앉을 뿐’의 미덕이다.
그러므로 송나라의 유명한 선사(禪師)였던 몽산 덕이(1231~1308)는 그의 ‘휴휴암좌선문’에서는 “대범 좌선이라 하는 것은 모름지기 지선의 자리에 사무쳐서 마땅히 스스로 성성하게 하는 것”이라고 한 것이며, 원불교의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그 도만 밝히고 그 공을 계교하지 아니하면 큰 공이 온다(‘대종경’ 인도품 7장)”고 하신 것이다. 그러니 여러분, 명상하고 싶다면 지금 그 자리에 그저 잠자코 앉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