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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송철호의 사기 열전 7] 유가(儒家)가 부정한 유가, ..
오피니언

[송철호의 사기 열전 7] 유가(儒家)가 부정한 유가, 순자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23/05/22 09:48 수정 2023.05.22 09:48

송철호
고전문학 박사
1.
순자(荀子)는 전국시대 유가(儒家) 중 맹자와 더불어 가장 높은 명성을 얻은 인물이다. 그러나 주희를 중심으로 한 남송시대 성리학자들이 맹자를 공자에 버금가는 아성(亞聖)으로 숭상한 데 반해, ‘성악설’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순자(荀子)를 비난하고 이단시하면서부터 순자는 유학사 주류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됐다. 그러나 순자가 전국시대 말기에 유가는 물론 그 외 제자백가를 통틀어 최고 석학이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고 있다.

순자는 기원전 335년께 태어나 기원전 238년께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순자가 학자로 왕성한 활동을 하던 때는 진시황 천하통일을 눈앞에 둔 전국시대 말기였음을 알 수 있다. 순자는 본래 조(趙)나라에서 태어났으나, 15세 때부터 천하 인재와 선비들 집합소였던 직하학궁(稷下學宮)이 있는 제나라에 유학해 공부했다. 당시 직하학궁이 있던 제나라 직하(稷下)지역은 학사촌(學士村)이라고 불릴 정도로 학문이 융성한 곳이었다. 이곳에서 공부하고 또 인정받는다는 것은 학자로서 이름을 드날릴 수 있는 보증수표였다. 순자가 직하에서 어떤 존재였는지에 대한 기록이 『사기(史記)』 「맹자ㆍ순경 열전(孟子荀卿列傳)」에 실려 있다.

순자는 조나라 사람인데, 제나라에 건너와 학문을 닦았다. 양왕(襄王, 기원전 283~264년)이 제나라를 다스릴 때 추연(鄒衍)ㆍ전병(田騈) 무리는 이미 모두 세상을 떠나, 직하학궁에서 순자가 가장 나이 많은 스승이었다. 제나라에서는 열대부(列大夫) 자리가 모자라면 그때그때 보충했는데, 순자는 세 차례나 좨주(祭酒)가 됐다.

직하에는 당대 지식계를 대표하는 석학이라고 할 만한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이곳은 적게는 수백명에서, 많게는 천여명에 이르는 학자와 인재가 저마다 자기주장과 사상을 내놓고 겨루는 학문의 경연장이기도 했다. 따라서 직하학궁 학자들을 대표하는 우두머리로 추대되려면, 그들이 형성하는 지식사회 내부로부터 그 학문적 깊이와 역량을 인정받아야 했을 것이다. 한 마디로 당대 최고 석학으로 불릴만한 사람만이 직하학궁 우두머리가 될 수 있었다. 사마천이 순자가 세 차례나 맡았다고 기록한 좨주는 직하학궁 우두머리를 말한다. 즉, 순자가 세 차례나 직하학궁(稷下學宮) 모든 학자를 대표하는 우두머리를 지냈다는 뜻이다. 순자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학문적 깊이와 역량을 갖췄던, 전국시대 말기 최고의 석학이었다.

2.
성악설은 인간 본성은 악하다는 관점이다. 흔히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악하다”는 주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은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악으로 기우는 경향을 지닌다’라는 말이다. 이 악에 빠져들지 않기 위해서 ‘올바르고 질서 있으며 공평하고 다듬어진 것’인 규범으로 자신을 수행해야 한다며 법과 규범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인간 내면에 있는 본성으로는 악으로 빠지게 되므로, 인간 밖에 있는 법과 규범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말이다.

순자는 맹자의 성선론에 비판을 가하며 인간의 성(性)이 추악하다는 성악설을 말하고, 본성으로부터의 선이 아닌, 후천적인 교육과 학문으로부터의 선이 유학의 본질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맹자는 성(性)을 선(善)으로 규정했기 때문에 학문이나 교육을 성(性)의 연장선으로 봤다. 『순자』를 보면 “맹자는 사람이 학문하는 것은 그 성(性)이 선(善)하기 때문이라고 했으나, 나는 그렇지가 않다고 하겠다”는 문장이 나온다. 그의 이론은 인간 본성은 배고프면 먹으려고 하고, 힘들면 쉬려고 하고, 추우면 따뜻해지려고 하는 것이므로 배고파도 가족과 나눠 먹고, 힘들어도 꾹 참고 일하는 등 행위는 인위적인 결과이지, 자연적인 본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연 세계에서는 상관없지만, 문명 세계에서는 그러한 본성으로 살아서는 안 되는데, 낙후된 환경 속에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인위적 윤리를 얻지 못하고 혐오스러운 본성에 따라 사는 바람에 춘추전국시대와 같은 난세가 왔다는 것이다.

맹자는 ‘인의(仁義)란 배우지 않아도 할 수 있는 것(良能)’이라 봤지만, 순자는 배워야 할 수 있는 것으로 봤다는 데서 차이가 있다. 맹자는 선한 행위란 단순히 그 ‘선함’을 배운다고 행하는 것은 아니며, 사람의 선한 행위는 사람의 ‘감정’에서 출발해야 더 자발적이고, 그 동기는 더욱 강해진다고 봤다. 하지만 순자가 볼 때는 ‘젖먹이가 어버이를 사랑하는 것’은 다만 동물적 가족애일 뿐 인(仁)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으며, ‘장성해 형을 존경하는 것’은 분명 의(義)이지만 그것은 자연적인 순종성의 발로가 아니라, 장성하는 과정 중에 이미 가정교육을 거쳤으므로 도출된 인위의 결과다. 즉, 순자가 주장하는 것은 선(善)이란 배우지 않으면 할 수 없고, 배워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3.
순자는 사람 본성을 악하다고 생각했다. 인간이 본질적ㆍ이성적으로 악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타고난 본능 혹은 동물적 욕망의 결과가 악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탄생 후 사회적 존재가 되면서 인간의 악한 성질이 발현된다는 의미다. 그 발현 양태는 경쟁과 다툼이며 결과는 사회적 혼란이다. 순자가 성악설을 제기한 목적은 인위적인 교육과 감화를 통해 인간의 악한 성질을 바꿔 선한 행위를 하도록 이끌려는 것, 즉 화성기위(化性起僞)였다. 따라서 순자 성악설의 요지는 인위적 예의를 강조하는 데 있다.

순자의 인식론은 소극적인 적폐의 해소, 즉 해폐(解蔽)와 적극적으로 명분을 바로 세워 공공 인식에 도달한다는 정명(正名)으로 대표된다. 인간에게 본질적으로 내재하는 맑고 깨끗한 마음이 가려져 있을 때 한쪽으로 치우치는 폐단이 생겨나므로 인위의 결정인 예를 통해 쌓여가는 폐단을 해소하는 것이 올바른 인식에 도달하는 길이라고 주장한다. 명분을 바르게 세움으로써 공공 인식에 도달할 수 있으며, 인위의 결정체인 예의로 사회 혼란을 야기하는 인식의 헷갈림을 바로잡아 줘야 한다는 것이다.

순자는 외재적 사회 규범을 통해 질서 있는 사회를 복원하고자 했다. 순자는 예의야말로 도덕적으로 완벽한 질서를 구가할 수 있는 매우 구체적이고도 실행 가능한 규범이며, 역사적으로 성왕의 나라에는 예의의 대원칙인 통류가 관통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시ㆍ서를 통한 내부적 성인 공부, 즉 내성(內聖)의 길보다는 예의를 드높이는 외부적 왕도의 실천 즉 외왕(外王)의 길을 더 중시했다.

순자는 예의라는 도덕의 틀을 통해 모든 사회 문제를 극복하려 했다. 사람 사이 원만한 관계를 의미하는 예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 함으로써 순자는 예에 사회적 생명을 불어넣었다. 이 예는 동아시아 사회 전반에 걸쳐 삶과 사회의 핵심이 되었다. 공자가 유학을 보편 학문으로 승화시킨 유학 발전의 첫 번째 위업을 달성하였다면, 순자는 유학을 사회철학으로 구성해 낸 유학 발전의 두 번째 위업을 달성한 것이다. 현대사회는 법의 지배가 사회정의 척도가 된다. 제도보다 인간을 앞세운 것이 예이고, 사람보다 제도를 앞세우는 것이 법이다. 법을 만들고 지배하는 사람이 정치의 핵심이어야지 법이 사람을 지배하는 정치여선 안 된다. 이를 긍정한다면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데 순자의 예론(禮論)은 매우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4.
순자는 공자 사상 중 예(禮)를 강조해 발전시켰는데, 사람 본성은 착하다는 맹자의 성선설에 반대해, 악한 본성을 예(禮)를 통해 변화시켜 선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성악설을 주장했다. 그는 사람의 본성은 악해, 날 때부터 이익을 구하고 서로 질투하고 미워하기 때문에 그대로 놔두면 싸움이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고치기 위해서는 예의를 배우고 정신을 수련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순자 사상에서 바탕이 된 것은 예를 지상(至上)의 것으로 한다는 태도다. 공자는 있는 그대로의 종교의례ㆍ제도ㆍ관습을 예로 삼아 성인 주공에 의해서 집대성된 중국인의 전통적 문화유산으로서 신뢰하고 존중했다. 순자는 기본적으로는 공자의 이러한 태도를 지지한다. 그도 예는 성인의 작위(作爲)에 의한 것으로 영원히, 즉 시대 제약을 초월해 무한하게 타당성을 갖는다고 한다. 그러나 상고(上古)의 성왕(聖王) 업적은 시대가 오래되므로 전승이 완전하지 못해 후세 사람으로는 그 전모를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상고의 성왕, 즉 ‘선왕(先王)’이 만든 예는 후세의 왕, 즉 ‘후왕(後王)’의 업적을 보고 추정해야 한다고 해 예를 생각하는 기준을 동시대로 옮겨버린다. 그리고 예를 구체적으로 생각하는 순자는 후왕이 예의 내용에 새로 추가하는 요소인 법률에도 성왕의 예와 같은 권위를 인정하고 그것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했다. 그 결과 정치사상에서 그는 공자 이후의 덕치주의 전통에 새로 법치주의의 요소가 추가된 것이다.

순자는 송나라 이래로 유학자들로부터 완벽하게 부정돼 흔적조차 없을 정도로 자취를 감췄다. 순자의 비극은 성리학 발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송나라 때 주자에 의해서 집대성된 성리학은 기본적으로 맹자의 성선설을 사상의 토대로 한다. 중국 유학사에서 맹자가 공자의 아성으로 대접받고 그의 저서 『맹자』가 경전 반열에 올라선 것은 송나라 때부터다. 주자는 자기 사상의 근원으로서 『맹자』를 경전 반열에 올렸으며, 유가의 도통을 공자-증자-자사-맹자-주자로 정리했다. 그런데 순자의 성악설은 성리학 사유 토대를 무너뜨릴 수 있다. 그러므로 순자를 이단시하며 순자의 존재를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 주자 이후 학자들, 조선 학자들도 마찬가지다. 성악설을 주장한 순자를 인정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순자는 묻혔다. 순자의 비극은 지금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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