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진 소토교회 목사 |
거룩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노예살이하던 이집트에서 탈출해 광야를 지날 때 이들을 먹이기 위해 하나님께서 직접 하늘에서 내려 준 곡식인 만나와 하나님께 제사 지내기 위해 제물로 바쳐진 것을 말한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지역에서 볼 수 있는 개는 애완용 개가 아니라 주인 없는 들개다. 사람들은 이 개들에게 상해서 사람들이 먹을 수 없거나 상처 입거나 병들어 죽어가는 가축을 먹이로 줬다. 이런 상한 것을 먹고 사는 들개들에게 하나님께 바쳐진 거룩한 재물을 먹이로 주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진주는 당시 왕이나 귀족이 자신을 치장하는 아주 귀한 보석이다. 그런데 이런 귀한 보석을 돼지에게 던져 준다? 말이 안 되는 미친 짓이다. 개에게 거룩한 것을 먹이로 주지 않는 것과 진주와 같은 보석을 돼지에게 던져주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제정신이라면 이런 짓을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이런 당연한 말씀을 그 제자들에게 하신 것일까?
예수께서 가르친 진리의 말씀을 두고 복음이라고 한다. 이 복음은 사람들을 변화시킨다. 개ㆍ돼지 같이 살아가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백성으로 탈바꿈시키는 힘이 있다. 그래서 누구든 이 복음을 듣고 믿으면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다.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일까?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한다. 인간이 하나님 뜻을 알 때 인간으로서 참다운 삶을 살게 되니, 복음이 가장 중요하다고 단언한 것이다.
그런데 이 귀중한 것을 개ㆍ돼지가 먹는 부정한 것으로 만든다면 어떻게 될까? 절대 해서는 안 될 일이며, 한다면 그건 정신 나간 짓이다. 하지만 그런 정신 나간 짓거리를 하는 이들이 있었다. 예수님 당시에도 있었고, 지금도 그렇다.
예수님께서 개와 돼지를 앞세워 복음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것은 바로, 이 이유다. 인간의 삶을 본질적으로 거듭나게 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하는 이 거룩한 복음, 귀중한 복음을 개 ㆍ돼지의 먹거리로 타락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인생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진리를 개ㆍ돼지나 먹는 상한 것으로 변질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복음이면 복음이지 상한 복음이 있을까? 사람은 죄의 본성과 욕구, 욕망이 있으며, 그런 죄의 본성대로 살고 싶어 하는 성향이 있다. 또한. 신앙을 가지고 예수님 가르침을 들으면서 거룩하고 살고자 하는 소망도 있다. 겉으로는 거룩한 사람인 양 보이고 싶고, 그러면서 뒤로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욕망을 마음껏 분출하며 살아가고 싶어 한다. 죄와 거룩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고 끊임없이 줄타기하다 보면, 복음이 자신을 거룩하게 변화시켜 주기보다는 적당히 옹호해 주길 바라게 된다.
그런 마음에서 생겨난 것이 바로 성공주의 신학이다. 하나님께서 신앙이 독실한 자에게 복을 주셔서 세속적인 성공을 거두게 하시고, 이로 부와 권세, 명예를 누리며 살아가게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이러다 보니 신앙의 목적이 세속적인 성공과 부와 명예, 권력을 많이 얻고 누리는 데 두고, 하나님의 말씀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것은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게 된다. 신앙이 세속화돼 버리고, 진리를 따라 살아가기보다 점점 타락의 길을 걷게 된다. 독실한 기독교인이라 하면서 세속의 욕망을 좇아가는 타락한 신앙인이 되는 것이다. 이런 경향은 이단 사이비 종파에서 더 뚜렷하고 심각하게 나타난다.
복음은 욕망과 욕심, 죄에 찌든 인생을 구원한다.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하는 힘을 준다. 인생을 아름답게 하고, 거룩하게 한다. 하지만 복음을 세속적인 것으로 변질시켜 상한 복음이 되면 구원의 힘은 잃어버리고, 사람을 개ㆍ돼지처럼 살게 하는 것이다.
요즘 기독교에 대한 비판이 거세다.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상한 복음에 있다. 상한 복음을 먹고 탈이 난 것이다. 이제 상한 복음이 아니라 온전한 복음을 먹어야 한다. 예수님 말씀을 따라 세속적인 욕망에 물든 삶을 버리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부단히 닮아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