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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슬기로운 명상생활] 애쓰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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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명상생활] 애쓰지 말라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22/01/11 09:56 수정 2022.01.11 09:56

박대성 원불교대학원대학교 교수(원불교 교무, 명상ㆍ상담전문가)


명상을 통해서 건강이나 마음의 평화를 얻겠다는 동기는 소중한 것이지만, 중도(中道)를 넘어서 집착에 머물게 되면 얻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특정한 ‘그 무엇’이 되기 위한 목적으로 수행을 해서는 또한 이룰 수 있는 것이 없다. 명상을 통한 마음공부는 포인트를 적립하는 것이 아니다.

특정한 대가를 바라는 행위는 거래지 명상이 될 수 없다. 이와는 반대로 무엇이 되려고 애쓰지 않는 것이 수행의 목표다. 일견 모순으로 보일지 모르나 애쓰지 않아야 있는 온전한 나 자신을 회복할 수 있다.

중국 송나라 시절에 선(禪)의 진리를 고스란히 담았다는 평을 듣는 『벽암록』이라는 책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담겨있다. 불교를 지극히 믿어 도처에 절을 세우고 스님들을 공양했으며, 스스로 법복을 입고 경전을 강론해 ‘불심천자(佛心天子)’라고 불린 양나라 무제(武帝)가 인도에서 건너온 달마 대사에게 자신의 공덕을 인정받기 위해 물었다.

“짐은 사찰을 일으키고 스님들에게 도첩(국가에서 인정한 신분증명)을 내렸는데, 무슨 공덕이 있겠습니까?” 달마는 단칼에 “공덕이 없다(無功德)”고 답했다.

그렇다고 양무제의 공덕이 어디로 가겠느냐만, 그것은 진실한 믿음이 아니다.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고 전력을 다했던 보시와 수행의 공덕은 쥐려고 애를 쓸수록 흩어지는 손바닥의 모래알과 같다. 마음 밖에서는 아무것도 구할 수 없다. 억지로 힘을 써서도 얻을 수도 없다.

소태산 박중빈도 “세상 사람들이 여의보주와 해인(海印)을 경전 가운데에서나 명산대천에서 찾아보려고 애쓰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은 마치 물에서 달을 건지려고 애쓰는 것 같아서 평생 정력만 소모시키고 세월만 허비하고 말 것이니 어찌 어리석지 아니하리오. 자기의 마음을 얻어 보아서 마음 가운데 욕심 구름을 걷어 버리며 그 마음에 적공을 들여서 하고 싶은 것과 하기 싫은 것에 자유자재할 힘만 있고 보면 그가 곧 여의보주인 것이다”(『대종경선외록』 영보도국장, 5절)”고 했다.

억지로 구하지 말고 오직 있는 그대로 자신의 마음을 바라보기만 하라. 명상할 때도 마찬가지다. 망상이나 졸음이 올 때, ‘왜 이렇게 딴생각이 나고 졸음이 오는 걸까? 나는 명상 체질이 아닌 걸까? 졸지 말고, 잡념을 없애고 더 잘해야 하는데…’ 등 갖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그러나 이렇게 애를 쓰고 용을 써도 망상이나 졸음이 사그라지기는커녕 오히려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된다. 자신을 통제하려는 노력이 반대로 통제 불능의 상태를 만든다. 이럴 땐 그저 내려놓고 마음을 쉬게 만드는 것이 더욱더 빠르게 망상과 졸음을 제어하는 방법이다.

필자는 우연한 인연으로 어린 시절부터 기공(氣功)과 태극권(太極拳)을 수행하고 있다. 처음엔 어찌나 재미가 있는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종일 수련했다. 그러나 빨리 고수(高手)가 되고 싶은 욕심에 억지로 밀어붙이면서 연습을 하다 보니 마음에는 조급증과 몸에는 긴장이 찾아왔다. 애를 쓰고 또 썼지만, 진도는 나가지 않았다. 그때 본인을 지도하셨던 사부(師傅)께서는 더 치열하게 밀어붙이기보다는 “당분간은 힘을 빼고 쉬면서 놀 듯이 수련하라”고 지도했다. 마음공부는 오히려 긴장을 푸는 것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이처럼 몸으로 체득하게 됐다.

‘욕속부달(欲速不達)’, 서두르면 이룰 수 없다. 애쓰지 말고 몸과 마음에 힘을 빼고 천천히 그리고 지그시 거기에 머무른다. 그때 보이는 것은 분명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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