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대성 원불교대학원대학교 교수(원불교 교무, 명상ㆍ상담전문가) |
슬플 때 함께 슬퍼하고 기쁠 때 함께 기뻐하는 사람, 나아갈 때와 물러서야 할 때를 분명히 아는 이를 우리는 마음을 중도(中道)에 맞게 쓰는 사람이라고 한다. 또, 마음이 한 곳에 동(動)해도 그 대상에 대한 집착이 없고 고요할 때도 한쪽으로 기울지 않는 사람을 우리는 성인(聖人)이라고 부른다. 명상의 맛이 깊어질수록 대상에 애착과 자기에 대한 아집에서 해방돼 자연스럽게 자신을 내려놓고 상대의 정서와 감정에 온전히 공감(共感)할 수 있다.
이것을 옛사람들은 나의 고집을 버리고 대상을 그대로 반영한다는 의미에서 ‘사기종인(舍己從人)’이라 했다. 가령 무술가가 자신의 완력으로 상대방을 제압하는 것이 아니라 전신을 완전히 이완한 상태에서 상대의 힘을 역으로 활용해 그대로 돌려주는 기술인 ‘화경(化勁)’과 같은 것이다. 자신과 세상에 대하여 주관을 놓고 있는 그대로를 보는 훈련을 통해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삶이 가능해진다.
고금을 통틀어 몸과 마음의 관계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있다. 크게 이 둘이 서로 분리됐다고 보는 견해와 하나로 통합돼 있다고 보는 것의 두 가지 관점이 있다. 서양적ㆍ합리적 사고를 하는 경우 전자를 따르려는 경향이 강하고 동양적 · 직관적 사고를 하는 경우 후자를 택하는 경향이 짙다.
그러나 실제로 몸과 마음은 어느 한 가지 상태로 무 자르듯 분명하게 나뉘지 않고 상황에 따라 둘이 됐다가 하나가 됐다가 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출근하기 싫은 월요일 아침, 침대 위 몸은 천근만근이지만, 마음은 어서 일어나라고 외치고 있다. 몸과 마음이 분리된 전형적인 상태다. 반면, 독서나 영화 등 무언가에 깊이 몰입해 있는 순간에는 몸과 마음이 하나로 딱 붙어 있다. 이때는 피로도 상대적으로 덜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고도의 정신집중 상태인 ‘삼매(三昧)’라고 할 수 있다.
일상 속에서 우리는 심신이 하나로 통합된 순간보다는 분리돼 따로 작용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이때 눈, 귀, 코, 혀, 몸, 마음 곧 육근(眼, 耳, 鼻, 舌, 身, 意)이 서로 각기 따로 노는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입력되는 모든 정보는 왜곡되기 마련이다. 지나가는 사람의 무심한 눈빛에 ‘왜 날 째려보나?’ 하는 오해가 시비를 불러올 때도 생긴다. 귀에 들리는 소리와 코로 들어오는 향기도 ‘나’라고 하는 강력한 아집에 왜곡돼 순서를 잃게 된다.
이처럼 육근의 순서를 잃게 만든 왜곡된 감정의 발생 이면에는 분리된 몸과 마음의 관계가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분리된 상황에서 우리의 몸과 마음은 순서를 잃게 된다. 여기에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우리가 흔히 ‘나’라고 생각하는 육근이 실상 내가 아니라 ‘나의 것’이라는 사실이다. 내 것이니까 소유권을 내가 갖고 있어야 당연한데, 육근이 역으로 나를 몰고 다니는 주객이 역전된 상황이 발생한다.
이때에는 육근이 곧 나라는 관점(동일시)을 깨버려야만 한다. ‘나는 나의 생각이 아니다’, ‘나는 나의 느낌이 아니다’, ‘나는 나의 육근이 아니다’라고 분리해 바라봐야 내 삶을 가로막는 인지적 왜곡이 바로잡혀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다.
육근을 ‘나’라고 착각한 구부러진 거울로 받아들인 정보와 ‘본래의 나’를 분리해 바라보면 마음의 빛이 밝아진다. 객관적이고 냉철하게 자신의 육근 작용을 분리해 바라볼 때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마음의 중심이 잡힌다. 몸과 마음을 하나로 조율하되, 나를 나의 육근과 동일시하지 않고 분리해서 다스려야 한다. 그래야 정신의 자주력을 세울 수 있고 심신을 통합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