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철 시인 |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된 계기는 주응식 작가가 펴낸 책, ‘나는 왜 불안한가’를 읽으면서다. 불안이란 살면서 만나고 싶지 않은 인물과 마찬가지다. 스토커처럼 수시로 감시하고 윽박지르고 삶을 끊임없이 간섭하는 자라 말해도 좋다. 종내에는 트라우마라는 올가미를 던져 가둬버리고 만다.
표지 그림은 빈센트 반 고흐, ‘영원의 문’이다. 의자에 쪼그리고 앉아 푹 고개를 떨궈 얼굴은 드러나지 않지만 한눈에 보기에도 슬픔과 절망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초상화이면서 초상화가 아닌 그림에서 사람이 가진 마음 지문이 보인다. 고뇌를 다른 말로 하면 불안이 가진 모든 것을 아우르는 말이라 해도 된다.
‘나는 왜 불안한가’ 책 표지 |
이 책 등장인물은 의외로 많다. 하지만 각자 맡은 역할이 뚜렷해 혼선과 혼란을 초래하지는 않는다. 모두 불안과 연관이 있는 인물이다. 왜 이토록 많은 이들을 소집했을까? 그 실마리를 푸는 데 최소 이름만 들어도 아는 미술가 열 명과 철학자 세 명이 필요했다. 미리 주눅 들 필요는 없다. 얼마나 자상하고 친절한 전개인지 읽는 내내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몰개성 시대이자 거대 담론이 무시되고 함몰된 오늘, 화두를 던지는 책이다.
불안은 왜 생기는 것일까? 한마디로 결핍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가난, 질병, 전쟁, 아픔, 폭력 등은 불안이 가져다준 다른 이름이다. 따지고 보면 누구나 겪는, 겪을 일이다. 충만도 결핍이라는 탈을 쓰고 있을 뿐이다.
어떻게 불안이란 존재 없이 삶을 이어나갈 수 있을까? 아쉽게도 이 책은 처방전이 아니다. 불안이라는 어둠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해보자는 의도다. 답? 있을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마치 암 환자가 자신 처지를 어떻게 수용하고 이겨나가는지 과정에 참여하는 일이다.
미켈란젤로 메리시 디 카라바조, ‘나르키소스’. - 자기애, 나르시시즘은 왜 필요한가? |
일상에서 부닥치는 ‘불안’은 오히려 삶을 성찰하게 만드는 에너지이자 기회다. 이 책에서 거론하는 화가와 철학자들은 그 존재 자체로 불안 덩어리다. 지금에 와서야 이들에 환호작약하는 모양새가 좀 우습긴 하지만 말이다. 고마운 점은 이들이 겪고 나눈 사건(?)들을 우리는 해부학 관점에서 본다. 관음증이라고 말해도 좋다. 내용은 그만큼 상상과 즐거움을 더해준다.
그림 주인공들이 불안 당사자들이라면 철학자들 개입은 불안에 기생하는 원인을 분석한다. 앞서 말했듯 처방을 내리는 일은 하지 않는다. 다만, 내가 어떤 유형인지 발견하는 기쁨은 있다. 작가는 의사다. 임상 경험이 풍부하다. 책에서도 자주 언급되는 내담자와 나눈 대화는 이 책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왜? 각자가 가진 페르소나(persona)를 벗는 시간이기에.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가자. ‘실존’이란 도대체 무엇이며 실존을 위협하는 ‘불안’ 정체는 또 무엇이라는 말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불안을 떨쳐내는 행위가 아니다. 모임, 조직, 단체 등에서 존재를 증명하려는 행동은 불안과 동의어다. 뒷담화를 무서워하고 특정 자리에 끼지 못하는 삶을 낙오라 여기는 초라한 일상.
구스타프 클림트, ‘유디트’. - 의식과 무의식에 관한 진지한 물음을 던질 수 있다. |
작가도 살아가며 불안했던 사실을 종종 털어놓는다. 물리적 세 평 공간에서 진료하고 내담자를 만나지만 글은 평수가 넓다. 이 책이 가진 또 다른 미덕은 친절함에 있다. ‘이론과 실기’라는 딱딱함은 없다. 오히려 명작에 읽힌 기막힌 사연까지 감상하게 되니 그 속 깊은 내막을 알고 나면 그동안 왜 불안했는지 이유를 알게 된다. 저자가 ‘아트 테라피스트’는 아니지만 액자 그림을 벗어나 전하는 위로는 든든하다. 진료실을 빠져나와 미술 정원에서 나누는 너와 나 구분 없는 담백한 소통은 행복한 만남이다.
불안은 감기와 비슷하게 찾아온다. 약물에만 의존하지 말 일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던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 말을 믿어볼 시기다. 의문은 불안을 낳고 불안은 사망에까지 이르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의문은 삶을 끌고 가는 힘 있는 기관차다.
클림트나 뭉크, 고흐, 뵈클린, 카라바조, 키르히너, 루소, 쿠르베, 고갱, 사전트에 열광한다면 또 니체, 라캉, 하이데거를 좋아한다면 명심할 일이 있다. 그들 삶은 오히려 겪은 불안으로 명성을 얻었고 새롭게 살게 했으며, 죽음마저 의미 있게 호명됐다. 불꽃처럼 살다가 간 그들이 남긴 그림과 말은 우리에게 새로운 동력을 제공한다. ‘불안에 떨지 말고 자수하여 광명 찾자’를 이제는 간첩 표어로 생각하면 안 된다. 불안은 잠깐 어둠을 지나가는 터널일 뿐이다.
폴 고갱,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부분 그림) - 영원 회귀라는 문제를 심각하게 다뤘다. |
그대여 얼굴을 들라. 표지 그림 주인공은 고흐가 죽기 전 요양병원을 퇴원하며 남긴 작품이다. 전쟁 참전용사로 후유증을 앓고 있던 저물어가는 노을처럼 얼굴 감싼 노인, 어쩌면 고흐 자신인지도 모른다. 이 그림은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가난’, ‘질병’, ‘늙음’이라는 사라질 것에 연민이 아니다. 삶을 공고하게 다짐하게 만드는 놀라운 아이콘이기도 하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그러니 그대여, 이 책에 물어봐라. ‘나는 왜 불안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