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철호 고전문학 박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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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암은 1332년에 창건됐다. 극락선원(極樂禪院)이 있어서 늘 많은 수행승이 머물고 있다. 특히, 경봉(鏡峰)이 조실(祖室)로 온 1953년 이래로는 수행승들이 많이 몰렸다고 한다. 경봉은 통도사 주지를 두 번이나 지내셨다. 그는 선지식인으로는 드물게 70여년 동안 계속 일기를 썼다. 절에 가면 흔히 만나는 ‘해우소’(解憂所)라는 말은 경봉이 지은 말이다. 스님은 53년부터 82년에 “야반삼(夜半三更)에 대문 빗장을 만져 보거라!”는 말을 남기고 입적하실 때까지 극락암에 머물렀으니, 극락암의 역사 그 자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삼소굴은 경봉 스님이 1982년까지 거처하던 곳으로 유명하다. 삼소굴이란 이름은 ‘호계삼소’에서 따왔다고 한다. 중국 동진 때 여산 동림사의 고승 혜원 스님과 유교의 도연명, 도교의 육수정은 친교를 맺어 자주 왕래했는데, 하루는 혜원 스님의 처소에서 다담(茶談)을 나누다가 헤어질 때 그만 청담에 취해 혜원 스님이 호계다리를 넘고 말았다. 일생 산문 밖을 나가지 않겠다던 혜원 스님의 금율이 다담 때문에 37년 만에 깨어진 것이다. 이 사실을 뒤늦게야 깨달은 세 분 스님이 함께 웃었다는데, 이 일화를 후세 사람들이 ‘호계삼소’라고 했다.
2.
삼소굴의 주인 경봉은 1842년 4월 9일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사랑하던 어머니를 잃고 삶과 죽음의 의문을 풀기 위해 15살 무렵 성해 선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출가했다. 경봉은 어느 날, “종일토록 남의 보배를 세워도 반푼어치의 이익도 없다(終日數他寶 自無半錢分)”는 구절을 읽고 문득 깨달은 바가 있어 1915년 통도사를 나와 해인사, 금강산 마하연, 직지사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수행했다. 경봉이 통도사를 다시 찾은 것은 스승의 부름을 받은 30세 때였다고 한다. 경봉이 깨달음을 얻은 때는 36세 되던 어느 날 화엄산림을 시작한 지 나흘째 되는 날이었다. 갑자기 벽이 무너지듯 시야가 넓게 트이면서 오묘한 일원상만이 드러나는 경지를 체험한 것이다. 경봉은 그 뒤 쉬지 않고 정진한 끝에 20여일 만에 새벽 2시경 문틈을 파고드는 촛불이 춤을 추는 모습을 보고 순간 억겁의 의문이 찰나에 녹아버렸다고 한다. 그때 지은 시가 다음과 같다.
내가 나를 온갖 것에서 찾았는데
눈앞에 바로 주인공이 나타났네
허허 이제 만나 의혹이 없으니
우담바라 꽃빛이 온누리에 흐르네.
我是訪吾物物頭
目前卽見主人樓
呵呵逢着無疑惑
優鉢花光法界流
깨달음을 얻고 삼소굴 뒤에 올라가 덩실덩실 춤을 춘 경봉은 다음날 법좌에 올라가 『화엄경』을 설하였는데, 그의 법문은 이미 경계를 넘어 선 모습이었다고 한다. 경봉은 1953년 극락암 조실에 추대돼 그로부터 입적 순간까지 30년간 극락암 삼소굴에 머물면서 중생을 어루만지며 극락으로 이끌었다.
1982년 7월 17일, 임종이 가까워졌음을 느낀 시자 명정(明正) 스님은 “스님 가시고 나면 스님의 모습을 어떻게 뵙겠습니까?”하고 물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스님은 좌우로 돌아본 뒤 ‘야반삼경(夜半三更)에 대문 빗장을 만져 보거라’는 임종게를 남기고 그날 오후 4시 25분에 열반의 세계에 들었다. 그로부터 5일 뒤인 7월 21일 통도사 다비장인 연화대에는 10만 인파가 모여 스님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봤다.
3.
경봉선사는 다법(茶法)으로도 유명하다. 삼소굴에 머물면서 승속을 가릴 것 없이 찾아오는 사람에게 선다일미(禪茶一味)를 실천해 온 선승이었다. 조주의 다풍을 선가의 가풍으로 천착시킨 스님은 조주의 끽다거(喫茶去)를 염다래(拈茶來)로 이끌어냈다. 선가의 차를 논할 때 응송과 효당을 맨 먼저 거론하는데 근대 선차를 일으킨 사람은 단연 경봉 선사였다. 수많은 차인들과 교류하면서 ‘자네 차 몇 잔 마셨나’가 화두가 돼버린 경봉 선사는 고려의 다풍을 유일하게 이어온 선승으로도 각인된다. 경봉의 다법은 조선 찻사발에 말차 대신 잎차를 우려 마셨다고 한다.
차를 즐겨 마시기는 하나 다법은 물론 다미(茶味)조차 모르는 내게 경봉 선사가 이야기하는 다선일여(茶禪一如)의 경지는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문득 몇 년 전 지인에게서 받은 『삼소굴 소식』에서 경봉 선사가 혜암 스님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타인의 뜻과 말의 낙처를 모르니 괴롭고 괴롭다. 판대기를 짊어지고 다니지 말지어다. 손님을 맞을 때는 차를 올리고 모기를 쫓을 때는 모닥불을 놓는다” -경봉 배상-
문득 며칠 전에 읽은 김지하 시인의 9번째 시집 『유목과 은둔』에 나오는 ‘삼소굴’이란 제목의 연작시 중 삼소굴 15가 생각났다.
삼소굴 15
삼소굴
아궁이에
넋 타는 냄새
밤새도록
타고 타서
나뭇잎 되는 냄새
환생의 냄새
네 귀퉁이
모를 갈아
동그래미 빚어내는 넋의
내 넋 깊은 곳의
아아
신 새벽의
한 냄새
연화경(燃火經) 타는 냄새.
-김지하의 9번째 시집, <유목과 은둔>에서-
김지하 시인은 무슨 마음으로 저런 시를 지었을까. 삼소굴을 나선 나는 산정약수 한 잔을 마시고 주변에 설핏한 대나무를 바라봤다. 나는 대나무를 좋아한다. 곧게 뻗어 하늘로 향하는 기상도 좋고, 비워진 속의 허허로움도 좋다. 겉은 사시사철 푸르러 좋고 속은 언제나 희어서 좋다. 여여문(如如門)을 지나 일부러 극락교를 되돌아 나오니, 잠시 극락이었던 마음이 그새 다시 번뇌 지옥으로 변했다. 마음에 욕심이 많으니 어찌 쉬이 편안해지기를 바라는가 싶었다. 경봉 선사의 선시가 생각났다.
셋도 아니요 하나도 아닌데
안다는 것은 본래 모르는 것일세
하나도 아니고 아는 것도 없는 곳에
버들은 푸르고 꽃은 붉네
非三亦非一
有知本無知
非一無知處
柳緣又花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