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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칭다오, 아사히 그리고 동아시아..
오피니언

칭다오, 아사히 그리고 동아시아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21/03/10 15:26 수정 2021.03.10 15:26

 
↑↑ 서용태
육군3사관학교 군사사학과 강사
인문연구공동체 로두스 대표
ⓒ 양산시민신문  
#1.

1894년 봄 조선의 남부지방에서 폭정에 시달리던 동학교도들과 농민들이 개혁을 요구하며 들고 일어났다. 조선정부는 진압을 시도했으나, 자력으로 진압이 불가하자 청국에 원병을 요청했다. 청은 갑신정변 이후 일본과 체결한 ‘톈진조약’에 따라 일본에 청국군의 파병을 통보했다. 청과 동아시아 주도권 다툼을 하던 일본은 군대를 끌고 조선에 들어와 청과 전쟁을 벌였고,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어마어마한 전쟁배상금과 더불어 타이완과 요동반도를 손에 넣는다. 하지만 러시아ㆍ독일ㆍ프랑스 삼국간섭으로 일본이 요동반도를 다시 내놓게 되자 러시아의 위력을 실감한 조선정부는 급격하게 러시아세력에 기울었고, 이에 일본은 세력만회를 위해 급기야 을미사변을 일으켜 조선의 왕비를 살해하기에 이른다. 불과 1~2년 사이에 한ㆍ중ㆍ일 세 나라가 ‘얽히고설켜서’ 일어난 일들이다.

삼국간섭으로 요동반도는 청에 반환됐지만, 독일군이 산둥반도 자오저우만(胶州弯)에 상륙해 칭다오(青岛)를 점령하면서 1898년부터 칭다오는 독일의 조차지가 됐다. 당시 칭다오는 한마디로 독일의 땅이었다. 맥주를 즐기던 칭다오의 독일인들은 처음에는 본국에서 맥주를 수입해서 마셨다. 그러다가 라오산(崂山)에서 질 좋은 지하수가 나오는 것을 발견하면서 홍콩에 본사를 두고 있던 독일과 영국의 합작회사 Anglo-German Brewery가 1903년 8월 칭다오맥주를 설립했다. 칭다오맥주는 이렇게 시작됐다. 1904년 12월부터 본격적으로 생산을 시작한 칭다오맥주의 생산설비와 원료는 모두 독일에서 직접 가져온 제품을 사용했다.

↑↑ 칭다오맥주(출처 칭다오맥주 홈페이지)
ⓒ 양산시민신문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칭다오맥주의 주인이 바뀌게 된다. 칭다오를 점령한 일본군의 영향력 아래 1916년 대일본맥주(아사히맥주, 삿포로맥주, 에비스맥주의 합작회사)에 인수된 것이다. 칭다오맥주를 인수한 대일본맥주는 공장을 대규모로 증설하는 한편 지역에서 재배해 수확한 보리로 맥주를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태평양전쟁에 일본이 패망하면서 칭다오맥주는 중국의 국영기업이 됐다가 1990년대에 들어 민영화됐다. 민영화 이후 한때 주인이었던 대일본맥주에서 분사한 아사히맥주가 2009년에 칭다오맥주의 지분 20%를 매입해 2대 주주가 돼 다시 주인 행세를 하려 했으나, 중국과 일본의 영토분쟁 등으로 양국 관계가 악화되면서 2017년 아사히는 칭다오의 지분 전량을 다시 매각했다.

칭다오맥주를 인수한 대일본맥주는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의 맥주에도 영향력을 끼치게 된다. 조선에도 麥酒가 있었으나 보리를 원료로 한 술이었지, 지금의 우리가 마시는 맥주는 아니었다. 개항 이후 일본을 통해 조선에 들어온 맥주는 일부 상류층들만 마실 수 있는 술이었으나, 1920년대부터 점차 대중에게도 맥주가 소비되기 시작하자 일본의 자본과 기술을 들여와 조선에서 직접 맥주를 생산하기에 이르렀다. 대일본맥주는 1933년 8월 영등포에 우리나라 최초의 맥주회사인 조선맥주를 설립했다. 그해 12월에는 대일본맥주와 경쟁 관계에 있던 기린맥주도 영등포에 소화기린맥주를 설립했다.

↑↑ 1930년대 조선맥주주식회사 광고(출처 삿포로맥주박물관)
ⓒ 양산시민신문

일본이 패전국이 되고 조선이 해방되자 이들 맥주회사의 주인이 한국기업으로 바뀌었다. 조선맥주는 ‘크라운맥주’로, 소화기린맥주는 ‘OB맥주’로 상표를 바꿔 달고 계속 경쟁했다. 줄곧 앞서가던 OB맥주가 1990년대 들어 두산의 낙동강 페놀방류사건으로 주춤하던 사이 크라운맥주에서 깨끗한 천연암반수로 만든 ‘하이트’를 출시(1993년)하면서 단번에 시장을 장악했다. 그러자 전통의 소주강자 진로가 미국 맥주회사 쿠어스와 손잡고 맥주시장에 진출하며 ‘카스’를 출시(1994년)해 돌풍을 일으켰다. 선두 탈환을 노리던 OB맥주는 카스를 인수(1999년)해 또다시 뒤집기에 성공했다. 한편, 칭다오맥주의 지분을 인수하며 중국시장을 노리던 아사히맥주는 한국시장에도 눈독을 들이다가 롯데와 50대 50 지분으로 롯데아사히맥주를 설립하고 ‘클라우드’(2014년)를 시장에 내놓아 히트를 쳤다.

국산맥주 3개 브랜드가 경쟁하는 가운데 수입맥주 시장점유율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하이트와 카스에 지겨워진 한국인의 입맛을 사로잡기 위한 수입맥주의 경쟁도 갈수록 뜨거워지고 있다. 2018년까지 수입맥주의 절대강자는 아사히맥주였다. 아사히는 한일 관계가 경색되기 전까지 수년간 수입맥주시장 부동의 1위를 차지했다. 재미있는 것은 대일본맥주(아사히맥주)에서 출발한 하이트(크라운맥주/조선맥주)가 라이벌 카스(OB맥주/동양맥주)의 첫 주인인 일본 기린맥주를 수입하고 있다는 것이다.

↑↑ 아사히맥주(출처 아사히맥주 홈페이지)
ⓒ 양산시민신문

2019년부터 악화된 한일 관계로 인해 아사히를 비롯한 일본맥주의 시장점유율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양꼬치엔 칭다오!!”를 외치던 광고 덕분인지, 우후죽순 생겨난 양고기 전문점 때문인지, 지금은 칭다오맥주가 수입맥주 시장에서 1위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언제 미끄러질지 모를 1위를 말이다.


#2.
장황하게 맥주 이야기를 늘어놓았지만 지난 100여 년, 칭다오맥주와 아사히맥주 그리고 하이트와 카스 등 한ㆍ중ㆍ일의 맥주는 어지럽게 얽히고설켜 지금까지 왔다. 그저 기호식품에 불과한 맥주가 이 정도인데, 세 나라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것이 얼마나 많겠는가? 지난 역사를 보더라도 세 나라가 결코 홀로 발전해 온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서로가 때론 이웃에 도움을 주고, 때론 이웃에 고통을 줬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세 나라의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에 더 주목한다. 한국문화와 일본문화는 어떻게 다르고, 한국사람과 중국사람은 저렇게 다르고 하면서. 특히, 인터넷 공간의 중국ㆍ일본과 관련한 기사의 댓글들을 보면 참담할 지경이다. 원수도 이런 원수가 없다. 서로를 이렇게 미워하고 멸시하고 증오하는 것이 과연 세 나라에 어떤 도움이 되는지 모르겠다. 차이점만큼이나 세 나라는 많은 공통점이 있다. 무엇보다 지정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정치ㆍ경제적으로나 세 나라는 함께 부대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해방 이후 우리는 올바른 방향으로 식민지문제 내지 친일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그로 인해 근대화ㆍ산업화 과정에서 박정희 정권은 경제개발을 위한 동원이데올로기로 민족주의를 활용했다. 그 민족주의가 긍정적인 역할을 한 측면이 분명 있지만, 다분히 국수적 경향으로 경도돼 자기도취적인 일국주의 내셔널리즘을 만들어냈다. 단일민족의 신화를 국민통합의 강화에 이용해온 점, 또 이것이 새롭게 ‘창출된 전통’이라는 점에서 한국과 일본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한국과 일본의 단일민족론은 은연중에 자민족의 우수성을 전제로 하며, 자국에서 다양한 문화와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마이너리티의 존재를 무시하고 차별과 편견을 조장한다. 이주노동자, 다문화가정 등에 대한 작금의 한국인들의 인식은–지나친 비약이겠지만- 마치 관동대지진 때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에게 가지고 있던 인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필자가 이를 더욱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까닭은 박정희의 그림자를 극복하겠다는 소위 민주화 세력이 박정희식 민족주의를 강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적어도 민족주의 문제에서만큼은 민주화 세력이 박정희의 그림자를 지우기는커녕 충실히 계승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역대 정권은 개인의 경험과 고통을 마치 민족 수난의 표상인 것처럼 내세우고 반일감정을 내셔널리즘의 강화에 이용하는 경향을 보여 왔다. 현 문재인 정부에서도 반일은 여전히 국민통합의 핵이요 국민적 정서다. 이례적으로 문재인 정부는 집권 4년차임에도 여전히 40~50%의 높은 지지도를 기록하고 있다. 네오내셔널리즘이 과거 국가주의와 다른 것은 포플리즘을 이용해 자신들의 주장을 대중 속에 퍼뜨리고 있다는 점이다. 대중적 유명인이자 정권의 실력자였던 조국 씨는 청와대 민정수석으로 있으면서 일본과 대중을 향해 “애국이냐 이적이냐”고 일갈했다. 상당히 격렬한 민족주의+국가주의+전체주의적 성향이 강한 사람들에게서나 나올 법한 말이다. 이런 식의 이분법적 인식이야말로 박정희 체제의 유산이다.

1990년대 이후 국민국가를 상대화해서 보려는 시각과 함께 근대성과 내셔널리즘에 대한 비판적인 논의가 전개되기 시작했다. 또한, 종래 한국 근대사를 수탈과 억압이라는 관점에서만 바라봄으로써 객관적인 사실보다 민족적 관점을 우선시해 역사적 실체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반성도 뒤따랐다. 타국의 국가폭력과 타국인의 일탈 행위를 비판하기는 쉬우나 동시에 그와 동일한 기준으로 자국과 자국인의 그것을 성찰하기는 쉽지 않다. 성찰이 빠진 역사인식은 평화를 위협한다. 지금 중국과 일본을 비롯한 전 세계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방역에 국가적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런데 한국사회 곳곳에서 공식명칭이 아닌 ‘우한폐렴’이라 부르며 중국을 혐오하고,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고심이 깊은 일본에 저주를 퍼부으며, 심지어 중국인-일본인 포비아가 횡행하니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다. 이제는 국가와 민족을 넘어 다양한 ‘사람’의 모습을 그려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쪽바리’와 ‘짱깨’가 아닌 ‘사람’을 보자. 이웃을 이해하고 함께 손을 잡으려는 노력은 역사 화해로 이어진다. 우리 앞에 놓인 이 과제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 것인가.

결코 쉽지 않은 과제를 앞에 놓고 칭다오ㆍ하이트ㆍ카스ㆍ아사히맥주를 한 잔에 부어 시원하게 들이키며 ‘애국이냐 이적이냐’ 따위의 저열한 이분법적 사고를 노가리 안주마냥 잘근잘근 씹으면서 동아시아 시민이라는 새로운 상(像)을 상상해보자. 이런 상상이야말로 성숙한 시민의 바람직한 자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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