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대식 양산시 문화관광해설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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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저술은 부제가 말해주듯 ‘황산강 고장성(古長城)’의 위치 비정에 관한 연구인데, 양산읍성 이야기도 많이 나온다. 여기에서 양산읍성을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5세기 중반 신라 자비왕 때나 7세기 후반 신문왕 때에 축성된 ‘삽량성’과는 선을 그었다.
대신 여말선초의 고위 관리이며 문인지식인인 양촌 권근의 ‘양주성루시병서’(梁州城樓詩幷序)라는 사료를 새로이 발굴해, 양산읍성(양주성)은 고려 공양왕 때인 1390년에 완성된 것이라는 점을 논증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학술적인 문제라 견해를 달리하는 연구자도 있을 수 있겠지만, 공부가 일천한 내게는 이 이야기에 매우 큰 흥미가 일었다.
고인은 이 연구에서 고려 말 양산지역이 잦은 왜구의 침탈을 겪다가 급기야 1381년(우왕 7) 봄에는 왜구의 방화와 파괴로 읍치를 속현(屬縣)인 동평읍(지금의 부산광역시 부산진구)으로 옮겨갔다는 것과 이듬해 10월 이후에 피난 가서 떠돌던 백성들이 돌아와 1388년(우왕 14)에 성을 쌓기 시작해 1390년(공양왕 2)에 양산읍성(양주성)이 완성됐다는 주목할 만한 사실을 밝히고 있다.
왜구 대책으로 급조된 이 성은 15세기 초ㆍ중기에는 운영이 폐지됐다가 1492년(성종 23)에 신축이 아닌 증ㆍ개축으로 지금의 성터가 조성됐으며, 일제강점기인 1937년 이전에 읍성의 기능이 폐지됐다는 것, 성은 둘레가 3천710척(약 1.2km)에 높이는 13척(약 4.1m)이었다는 것을 기술하고 있다. 참고로 증ㆍ개축 전 양주성은 둘레가 2천950척 또는 2천888척이었다.
한편, 여러 고지도를 살펴보면 양산읍성은 특이하게 남문이 없고 동, 서, 북 3문이 있었는데 서문이 정문이었다. 성내에는 동헌과 객사를 비롯한 관청 건물들과 쌍벽루, 창포정, 창고, 감옥 등 건물이 있었다. 동헌과 객사가 있던 읍치의 중심지가 지금의 중앙동행정복지센터 일원이다. 성벽은 현재 5곳에 극히 일부가 잔존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로 이 5곳의 성벽 흔적을 탐방하기 위해 지난주에 ‘문화교육연구소 田’(소장 전이섭)의 지역학 공부 모임인 로컬애전(愛田) 회원을 안내해 ‘숨은 읍성 찾기’ 답사를 했다.
큰 성돌 위에 바로 시멘트를 부어서 담벽을 올린 집도 있고, 성돌을 제자리에서 밀어내고 텃밭을 넓힌 곳, 돌을 보려고 무성한 잎들을 밀어내니 쓰레기가 먼저 나오는 곳, 다 사라지고 새 돌 사이에 성돌이 한두 개 박혀있는 곳들이었지만, 그래도 이만큼이나 남아있는 것도 다행이 아닌가.
전체 둘레 1.2km 중에서 잔존 부분은 모두 합해서 겨우 40m 정도. 그것이나마 앞으로 사라져버리지 않기를 바라고 어디엔가 파묻혀있을 읍성의 흔적들이 나타나기를 기대한다. 아울러 관심을 가진 이들이 이렇게 쉽고 편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향토사 연구에 많은 성과를 이뤄주신 고인과 여러 선학께도 깊이 감사드린다.
선학들께서 오래전부터 양산읍성의 보존, 발굴, 복원, 학술조사, 교육자원으로 활용하는 방안 등을 여러 차례 강조해왔다. 현실적으로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세 성문 중 한 곳과 잔존 성벽 중 한두 곳 정도는 복원해볼 만하지 않을까.
양산읍성은 이 정도 하고, 중앙동 축협창고와 칠칠공사 건물 등 근대 유산에 대해서는 전 소장의 설명을 듣고, 황산베랑길 나들이로 답사를 마무리했다. 베랑길 코스를 예정보다 대폭 단축했음에도 배고파 죽겠다, 다리가 아프다, 너무 빡빡하다는 등 엄살성 불평이 터져 나왔다. 가벼운 나들이 기분으로 시작했지만, 의미와 울림은 가볍지 않았다.
이 글도 독자들께 가볍게 시작한 글인데 내용이 조금 빡빡해진 것 같지만 그래도 가볍게 읽어주시고 가볍지 않은 울림이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