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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역사는 의미를 되새기는 작업, 기억하지 않으면 의미도 ..
기획/특집

“역사는 의미를 되새기는 작업, 기억하지 않으면 의미도 없다”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19/07/02 09:50 수정 2019.07.02 09:50

■ 통도사 신평 독립만세운동과 의의 그리고 주역들의 삶

올해는 3.1만세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에서 다양한 기념행사가 열렸는데, 양산에서도 100년 만에 처음으로 지난 9일 신평 하북 만세운동 재현행사가 펼쳐져 눈길을 끌었다. 이에 앞서 지난 8일 (사)양산항일독립운동기념사업회 주관 ‘하북 신평 만세운동 100주년 학술대회’가 열렸다. 동부경남 최초의 만세운동인 신평 만세운동을 조명한 첫 번째 학술대회로, 학계와 지역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그 가운데 향토사학자 이병길 씨가 발제한 ‘통도사 신평 독립만세운동과 의의 그리고 주역들의 삶’의 내용을 정리해 보도한다. 편집자 주

ⓒ 양산시민신문

이제까지 논의를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19년 3월 13일 양산 신평장터에서 통도사 스님이 중심이 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양산은 1908년 서병희ㆍ김병희 의병장이 활동하고, 1919년 만세운동이 양산 장날 두 번이나 일어났다. 1932년 양산 농민이 양산경찰서를 습격해 가장 강렬하게 항일운동을 한 고을이다. 하지만 통도사 신평 독립만세운동이 경남도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만세운동임에도 자료 부족으로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1919년 2월 28일 통도사 스님이자 중앙학림 학생 오택언은 만해 한용운을 만나 독립선언서를 전달받고 통도사 독립만세운동 밀지를 받는다. 3월 1일 서울 만세운동을 한 뒤 독립선언서 4장을 통도사로 우편 발송하고, 3월 5일 통도사로 내려온다. 당시 통도사는 일제 사찰령에 의해 30본산 가운데 하나로 지정되고 근대 사찰로 변모하고 있었다. 통도사에는 명신학교ㆍ통도사지방학림ㆍ불교전문강원에서 청년과 스님들이 신교육을 받았다. 일제에 의한 식민지 고통의 문제점도 알고 있었다. 각 지방 3.1만세운동의 동력은 학생들이었다.

오택언은 통도사에서 동료 스님인 양대응과 신화수, 학생대표격인 김상문과 면서기 박세민을 만나 독립선언 취지와 독립만세운동 당위성을 피력했다. 하지만 오택언은 7일 경찰에 검거돼 서울로 압송된다. 오택언 진술에 따라 만세운동이 무산될 위기에 있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통도사에 학교가 있어 독립선언서 등사와 태극기 제작 등이 쉬웠고, 면서기가 있었기에 여러 도움을 받았다. 학생과 젊은 스님들은 비밀리에 만세운동을 차분하고 치밀하게 준비했다.

장날은 3월 14일이었지만 3월 13일로 정했다. 일본 경찰의 틈을 노리고, 13일이 신평장터에서 줄다리기 행사가 있어 장날만큼은 아니지만, 마을 주민 다수가 참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희생자를 최소화하고, 다중의 참여보다는 독립선언 의의를 전달하고자 하는 것에 중점을 뒀기 때문이다.

3월 13일, 통도사 학생과 스님들은 신평장터로 갔다. 주동자인 김상문ㆍ양대응ㆍ신화수ㆍ김진오 스님이 중심됐다. 면서기 박세문은 사태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장터 동쪽 거리에 짚으로 만든 줄다리기 밧줄을 놓고 많은 사람이 모였다. 주모자인 양대응 스님은 사람의 이목을 모으기 위해 땔감으로 쓰는 나뭇짐을 장터에 몇 짐 가져다 놓고 짚을 포개 불을 지른 뒤 불이야’라고 소리를 질렀다. 통도사 부속 보통학생과 지방학림 생도 4~50명, 불교전수부 생도 약 10명, 그리고 승려 약 10명이 주모자가 돼 만세운동을 감행했다. 특히 불교전수부 생도는 독립선언서 낭독ㆍ연설ㆍ배포에 힘썼다. 학생 가운데 일부는 교모에 붉은 띠를 매고 사람들을 인도하며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좁은 지역이었지만 순식간에 신평장터 일대에는 독립만세 함성이 울려 퍼졌다. 만세운동은 장터에서 시작해 지금의 신평중앙길을 따라 통도사 산문에까지 진행했다. 처음에 마을 주민들은 만세 소리에 놀랐지만, 이윽고 동참하며 ‘대한독립만세!’를 목청껏 불렀다. 인원도 소규모였기 때문에 번개 같은 만세운동이 일어날 수 있었다.

통도사 주재소에서 경찰이 출동하기 전에 재빠르게 흩어졌다. 하지만 주모자인 김진오 스님은 검거됐다. 신화수는 서울로, 김상문은 상해로, 박세문은 일본 고베로, 양대응은 모처로 피신했다. 통도사 신평 독립만세운동은 소규모였기에 큰 피해도 보지 않았다. 경남 최초 독립만세운동 소문은 인근 양산과 언양으로 퍼져나갔다. 특히 통도사 스님의 만세운동은 나중에 3월 31일 합천 해인사와 4월 4일 밀양 표충사 스님의 만세운동에 영향을 끼쳤다. 또 신평에서 5월 4일 대규모 만세운동이 다시 일어나 양산ㆍ언양까지 진출했다. 주모자인 통도사 스님들은 검거되지 않았기에 항일독립운동을 계속할 수 있었고, 훗날 통도중학교 배일교육에 까지 영향을 미쳤다.

신평 만세운동으로 김진오는 2년을 선고받았고, 오택언은 징역 8월을 복역한 뒤 포교사와 각종 불교활동을 했다. 김상문은 피신 후 상해 임시정부 특파원으로 활동했다. 면서기 박세문은 일본으로 피신했으나 검거돼 고문을 받고 사망했다. 양대응은 친일승려인 강대련 ‘명고축출(鳴鼓逐出) 운동’을 주도하다 징역 4월을 선고받았다. 해방 후 초대 통도사 주지로 통도중학교를 개교했다. 신화수 스님은 혁신단과 의열단에 가입해 활동하다가 ‘육혈포 암살단사건’과 ‘제2차독립만세추진사건’, ‘김상옥 종로경찰서 폭파사건’ 등에 연루돼 징역 2년을 살았다.

경남 최초로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통도사 신평마을! 역사는 의미를 되새기는 작업이다. 기억하지 않으면 의미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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