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화수(申華秀, 18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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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화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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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 이어> 1923년 3월 신화수는 감옥에서 출옥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김상옥의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으로 또 기소된다. 전우진(41, 경성우편국 인부), 안홍한(21), 김한(37, 무산자동맹회 위원), 이혜수(28), 서병두(44), 정설교(27, 휘문고보 학생), 신화수(27, 불교학원 생도), 윤익중(28, 동아일보 홍성분국장) 등 8명이었다. 1919년 제령 제7호 위반 강도예비죄로 기소됐다.-동아일보, 1923년 3월 15일ㆍ16일- 당시 신화수(27세, 현주소 경성부 당주동 16, 본적 경남 고성군 영오면 오서리 63, 불교학원 학생)는 몸이 좋지 않은 상태였다. 전우진과 이혜수는 분리심리 결정과 병으로 출석하지 못했다.-매일신보, 1923년 5월 27일
1923년 5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열린 김상옥 사건 선고공판에서 김한은 검사 구형보다 더한 징역 7년을 받았다. 윤익중 3년, 서병두 2년, 안홍한 1년, 정설교 1년 6개월, 신화수는 무죄를 선고받았다.-동아일보, 1923년 4월 28일ㆍ5월 11일ㆍ13일ㆍ19일ㆍ27일)- 방청객들도 판결이 가혹하다고 큰 불평을 하고, 정치범에는 예가 있는데 이번에는 좀 가혹하다는 평이었다.-동아일보, 1923년 5월 27일
신화수는 ‘대정 8년 제령 제7호 위반, 강도예비, 조선 독립운동에 관한 문서, 자금영수증, 인장에 사용할 비용을 교부받았다’는 혐의를 받았지만 무죄를 선고받았다.-경성지방법원, 1923년 5월 26일- 아마도 감옥에서 출옥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김상옥 사건과 연관성이 적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1923년 8월 의열단 김상옥 사건 연루자 신화수는 병으로 보석 된다.-동아일보, 1923년 8월 3일
1923년 10월 신화수(경성부 당주동 16번지)는 대정 8년 제령 제7호 위반, 강도 혐의로 ‘조선 독립을 목적으로 조직된 의열단의 폭탄 은닉을 응하고 독립운동자금을 제공하고, 독립선전문 배포 등 치안을 방해하는 데 방조했다’는 내용의 공소 기각을 받고 풀려난다. 김한(金翰) 징역 5년(1심 7년), 윤익상(尹益重) 징역 2년(1심 3년), 신화수(申華秀) 기각(棄却)(1심 무죄, 검사 항소), 정설교(鄭卨敎)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1심 1년 6개월), 서병두(徐丙斗) 징역 1년(1심 2년)을 선고받았다.-경성복심법원, 1923년 10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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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 후 만난 의열단원들. 첫째 줄 오른쪽 끝이 신화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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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10월 8일 조선 청명군대 본영(朝鮮 靑命軍大 本營)에서 특파한 개벽당원(開闢黨員)으로 최강(崔綱, 26), 신화수(申華秀), 이일화(李一化)가 체포된다. 밀송했던 모젤식 권총 두 자루와 탄환 37발과 함께 검사국으로 압송된 것이다. 총포화약(銃砲火藥) 취체령 위반(取締令違反)과 강도(强盜) 혐의였다. 하지만 무죄로 판명돼 9일 석방됐다.-동아일보, 1926년 10월 8일ㆍ9일
이후 1945년까지 신화수의 행적은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이 없다. 하지만 의열단원 활동은 계속했으리라 생각한다. 1946년 3월 광복단 중앙 기구를 개편해 한성지부를 결성할 때 비서과장부에 신화수가 임명된다. 1946년 5월에 인민당에서 탈당한 여운홍 등 106명과 함께 사회민주당결성준비위원으로 활동한다.-중앙일보, 1946년 5월 28일- 사회민주당 강령은 ▶우리는 조선의 완전한 독립과 민주주의 국가 건성을 기함 ▶우리는 계획경제제도를 확립해 전민족적 균등생활 실현을 기함 ▶우리는 민족문화를 앙양해 인류문화 향상에 공헌함을 기함이었다.-중앙일보, 1946년 6월 17일- 1946년 8월 3일 사회민주당 결당식을 종로청년회관에서 거행했다. 11일 총무와 중앙집행위원 발표가 있었다. 총무회는 최진, 허규, 여운홍(대표)이었고, 당무국장은 신화수였다.-서울신문, 1946년 8월 13일ㆍ자유신문, 1946년 8월 12일
1947년 1월, 사회민주당 중앙집행위원회 부서 개선 때 총무 여운홍, 최진, 허규 그리고 훈교국장에 신화수가 된다.-조선일보, 1947년 1월 9일- 이후 행적은 알려진 바가 없다.
❚ 박민오(朴玟悟, 치오致悟, 노영魯英, 1897/99~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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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에 있던 1923년 당시 박민오 사진, 목에 염주를 걸고 있는 것으로 봐 여전히 불심(佛心)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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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오-박노영 자서전 『Chinaman’s Chance(1943)』에는 1899~1976, 부인 박란영 자서전 『Fouring Four Way(1980)』에는 1897~1976이다. 일제 경찰 조사 때 1920년 24세로 보면 1897년생이다. 박노영 자서전과 부인 자서전에 그의 유년기 삶이 다르다. 특히, 박노영은 유학 전까지 청년 시절 독립운동에 대한 언급이 없고, 부인 자서전이 더 구체적이다-는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따라 만주로 이주했다. 유년 시절 초등교육 과정에서 일본 교육이 침투하게 돼 부모가 등교를 거부했다. 13세 때 부모가 당시 관습대로 박노영에게 결혼을 강요하자 가출했다. 만주를 유랑하다가 독지가 여성의 도움을 받아 절에 입양돼 승려로 출가했다. 부모 반대로 환속 후 신식교육을 받기로 하고 중국으로 갔다.-박노영, 『중국인의 기회』 자서전 내용으로, 독립운동 관련 사실이 없다.
1897년 경남 남해에서 태어나 서울 중앙학교에서 처음으로 교육받았다. 통도사 명신학교와 지방학림을 졸업한 후(?) 서울 중앙학교에 진학해 김성수 사택에서 기숙사 생활을 했다. 김성수는 김사용(金思容)의 집을 사서 숙소로 삼고 계동 중앙학교 교장 사택인 숙직실에서 그를 비롯한 3.1운동 준비모임 등 당대 지식인과 교사, 학생들 집합처로 삼았다.-황인규, 『대각사상(제30집, 2018년 12월)』, 「중앙학교 박민오의 독립운동」, 229쪽 참조
1919년 2월 28일 밤 한용운이 유심사에서 통도사 스님 오택언 등 10여명을 만났다. 1919년 3월 1일, 오전 수업 후 탑동공원 집결해 독립만세운동을 벌였다. “3월 1일 점심 먹을 때 동급생인 박노영이 조선 민족은 가만히 앉아서 있을 수 없으므로 정신을 차려야 한다. 최근에 무슨 일이 일어날 터이니 손뼉을 치거든 따라오라”고 했다. 시간과 장소는 알려주지 않았다. “박노영은 급장은 아니지만, 평소 대단히 진실한 남자다. 별로 완력을 쓰는 사람도 아니다. 지나치게 활발하지도 않다”-박수찬 심문조서- “활발한 사람이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끝까지 해내는 남아였다”-전준희 심문조서
1919년 3월 초순 ‘격문’을 발행했으나 돈이 없어 발행이 어려워져 강선필로부터 10원을 기부받았다. 김재룡 철판 원고, 박수찬과 박노영은 원고 작성을 각 3장 하고, 배포는 김세룡 300장, 박수찬 500장을 했다. 1919년 4월 김상옥의 혁신단 결성에 동참했다. 동대문 교회 영국인 전도사 피어슨(Pearson) 집에서 김상옥 주도로 중앙학교 윤익중, 박노영(박민오), 불교졸업반 신화수, 보성중 3학년 정설교, 휘문중 이춘식 그리고 서대군, 김우진, 김화룡, 심주택 등이 가담했다. 그리고 ‘혁신공보’를 발행했다. 김상옥이 단원 조직하고 선전과 배달, 박민오는 편집ㆍ취재ㆍ논설, 윤익중은 재정 조달을 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