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양산시민신문

통도사 신평 독립만세운동 주역들의 삶..
기획/특집

통도사 신평 독립만세운동 주역들의 삶

홍성현 기자 redcastle@ysnews.co.kr 입력 2019/06/11 09:29 수정 2019.06.11 09:29

■ 통도사 신평 독립만세운동과 의의 그리고 주역들의 삶

올해는 3.1만세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에서 다양한 기념행사가 열렸는데, 양산에서도 100년 만에 처음으로 지난 9일 신평 하북 만세운동 재현행사가 펼쳐져 눈길을 끌었다. 이에 앞서 지난 8일 (사)양산항일독립운동기념사업회 주관 ‘하북 신평 만세운동 100주년 학술대회’가 열렸다. 동부경남 최초의 만세운동인 신평 만세운동을 조명한 첫 번째 학술대회로, 학계와 지역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그 가운데 향토사학자 이병길 씨가 발제한 ‘통도사 신평 독립만세운동과 의의 그리고 주역들의 삶’의 내용을 정리해 보도한다. 편집자 주


-----------------------------------------------------------------------------------------

❚ 신화수(申華秀, 1896~?)

신화수는 경남 고성 출신으로, 통도사 수말사인 고성 옥천사-현재는 쌍계사 말사다- 출신 승려다. 당시 옥천사는 통도사 수말사 가운데 한 곳이었다. 그의 본적은 경남 고성군 영오면 오서리 63이다.

오택언(1897~1970)은 1919년 3월 1일 서울 만세운동에 동참하고, 만해 한용운 스님 밀지에 따라 만세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3월 5일 통도사로 내려왔다. 그런데 7일 그는 전보수배령에 의해 검거돼 서울로 압송된다. 그로부터 2~3일 뒤 통도사에 있던 신화수 스님은 오택언이 보낸 독립선언서 4부를 받는다. 오택언이 통도사로 내려오면서 우편으로 보낸 것이다. 오택언과 신화수는 아마 통도사 지방학림 혹은 불교전문강원 동기생인 듯 여겨진다. 오택언이 보낸 독립선언서는 통도사 신평 독립만세운동에 사용된다. 그러나 오택언 검거로 편지 수취인인 신화수 역시 검거될 가능성이 높았다. 통도사 신평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3월 13일을 전후로 신화수는 서울로 도피한다.

1919년 4월, 신화수는 김상옥과 동대문 교회 영국인 전도사 피어슨(Pearson) 여사 집에서 혁신단(革新團)을 조직했다. 김상옥 주도로 중앙학교 윤익중ㆍ박노영(박민오), 불교졸업반 신화수, 보성중 3학년 정설교, 휘문중 이춘식 그리고 서대군ㆍ김우진ㆍ김화룡ㆍ심주택 등이 가담했다. 김상옥은 총책, 김동수는 무기를 공급하며, 길림군정서와 조선독립군정서에 신문을 보냈다. 윤익중은 문중 땅을 처분해 재정을 담당하고, 서대순과 정설교는 비밀문서책을, 신화수는 집총대장을, 전우진은 연락책을, 장일진은 사격훈련을 지도했다. 암살단 취지서를 작성하고, 일본 고관에 보내는 경고문, 조선관리 사퇴권고문 등을 작성ㆍ인쇄했다. 폭탄 제조를 위해 화약과 약품을 구입했다. 김동순은 권총 3자루와 총알 300발을 가져왔다.-이성아, 『김상옥이야기, 경성을 쏘다』, 북멘토, 2014, 79쪽.

ⓒ 양산시민신문


혁신공보(革新公報)-1919년 후 혁신공보 발행은 김상옥 발행, 김법린 발행, 박치오 발행, 상해 임정 발행 세가지 형태가 있다. 이 발행에 공통적인 인물이 통도사 스님인 박노영(치오, 민오)이다-를 발행했다. 김상옥이 단원을 조직하고 선전과 배달, 박민오는 편집ㆍ취재ㆍ논설, 윤익중은 재정 조달을 담당했고, 신화수는 원고를 작성했다. 1919년 12월 김상옥 등과 암살단을 조직하고 총독과 일본 고관, 민족반역자 등을 숙청하기로 했다.

1920년 9월에 중국 길림에 근거지를 두고 조선에 침입해 암살을 계획한 대동단-대동단은 우리나라 정당과 사회단체 가운데 처음으로 사회주의를 표방한 단체다- 소속 육혈포 암살단 사건으로 체포됐다.

제암리 학살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미국 의원단이 경성에 도착하는 8월 24일을 기회 삼아 암살단과 만세단을 조직해 경성에서 대소동을 일으키려 한 사건이었다. 암살단장은 한훈(韓焄, 한우석, 30세, 본적 충청도 청양군, 현주소 경성부 입정정 笠井町)이다. 그는 상해 임정에서 국무총장 이동휘와 여러 국무대신을 만나 조선군사령부를 결성해 독립군 양성과 결사 암살단을 조직하기 위해 모젤식 육혈포 3자루와 탄환 300발을 가지고 경성에 왔다. 마침 김상옥이 암살단을 조직한다는 말을 듣고 같이 미국 의원단이 올 때 암살사건을 벌이기로 했다.

암살 제1 목표는 사이토 총독, 총독부 관료, 친일파였다. 순사 복장 4벌, 200개의 태극기와 미국기를 준비했다. 차량 3대를 준비해 2대는 사격 요원이, 1대는 탄약과 폭탄을 실었다. 종로를 지날 때 무장 사격 요원이 총독과 고관을 암살하고, 경찰서를 폭파하려고 했다. 심지어 경찰 병력이 출동하면 시가전을 벌일 준비도 했다. 서대순(서일순)과 이운기는 암살 요원으로 결의를 다지는 상반신 나체 사진을 촬영했다. 시민 선동과 만세 부르기는 이근영, 윤기중, 김형규, 윤상보가 담당하기로 했다.

ⓒ 양산시민신문


김상옥이 신문발행으로 인한 검거 경력 때문에 예비검속을 당한다. 김상옥은 도주하고, 김동순이 체포됐다. 김상옥의 집 비밀 벽장에서 암살단 취지문과 암살단 명부, 권총 케이스 등이 발견됐다. 김상옥의 피신을 도와준 사람이 경기도 경찰부 경부로 황옥(1885~1950?)이라고 한다. 결국 거사 전날 모두 검거됐다.

폭탄 5개, 권총 15자루, 탄알 300개 등을 가진 한우석과 정설교가 체포되고, 신화수(申華秀, 24세, 본적 경남 고성군, 현주소 경성부 와룡동(臥龍洞)도 다른 동지들 11명과 함께 체포된다. 미체포자는 김상옥(金相玉) 등 9명이었다. 김상옥은 은신해 있다가 10월 상해로 떠났다.-매일신보, 1920년 9월 29일ㆍ동아일보, 1920년 9월 22일, 10월 29일

그런데 1921년 5월 육혈포 암살단(대한군정서 암살단 사건) 사건으로 재판을 받는 중 진주에서 제2차 독립운동 사건이 적발된다. 3.1독립운동 이후 제2차 독립운동을 계획하던 김두현 외 13명이 경상남도 경찰부와 진주경찰서 합동수사대에게 체포된다. 김두현은 주로 군자금 모금활동을, 박치오(민오)는 제2차 독립운동을 준비했다. 신화수는 당시 경성감옥에 복역 중이었다. 이 사건에는 양신 출신 김봉길(25세, 자동차 운전수, 경상남도 양산군 하북면 지산리), 김덕봉(24세, 잡화상, 경상남도 양산군 양산면 남부리 299), 서상건(23세, 포목상, 경상남도 양산군 양산면 남부리 300)이 연루된다. 통도사 스님 박치오(朴致悟, 玟悟, 26세, 통도사 승려)는 소재 불명으로 체포를 피한다. 당시 박치오는 중국 상해를 거쳐 미국으로 가고 있었다.-조선독립운동 第1卷 分冊 朝鮮國內に於ける民族主義運動, 동아일보, 1921년 5월 14일

육혈포 암살단 사건으로 신화수는 1921년 6월 경성지방법원 공판에 회부돼 강도, 살인예비, 대정8년 제령 제7호 위반, 출판법 위반, 총포화약류 취체령 위반, 공문서 위조, 공갈취재미수, 사기 등 혐의를 받았다. 조선군정서에 가맹해 조선 내에서 조선독립군 자금을 모집하려고 권총, 실탄을 휴대하고 경성에 잠입, 암살단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취의서, 경고문을 작성ㆍ반포해 군자금 모집에 노력하며 총독부 정무총감 암살을 계획하는 등 치안을 방해한 혐의였다.-경성지방법원, 1921년 6년 21일- 1921년 11월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미결구류일수 중 300일-본형에 산입하는 판결, 경성지방법원, 1921년 11월 15일-을 복역한다.

1923년 1월, 서울 종로경찰서에 폭탄이 투척된다. 이 의거의 주인공이 의열단원 김상옥(金相玉)이었음은 그가 순국할 때까지 당시 경찰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앞의 종로경찰서가 폭탄 세례를 받은 지 5일이 지난 뒤인 같은 달 17일 눈 내리는 오전 3시, 그의 은신처인 삼판통(후암동) 304번지 고봉근(高鳳根)의 집이 종로경찰서 수사주임(三輪和三郞)에게 탐지돼 수십의 일경에게 포위됐다. 이에 김상옥은 단신으로 두 손에 권총을 들고 항전해 종로경찰서 유도사범 전촌(田村 다무라) 형사부장을 사살하고, 그 밖의 여러 명에게 중상을 입힌 후 포위망을 뚫고 남산(南山)으로 향했다. 장설(丈雪)이 쌓인 남산으로 일경은 군대 지원까지 받으며 뒤쫓았으나 결국 자취를 감추고 말았던 것이다. 이것이 당시 세상을 놀라게 한 삼판통 사건이었다.<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 © 양산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