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도사 신평 독립만세운동과 의의 그리고 주역들의 삶
올해는 3.1만세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에서 다양한 기념행사가 열렸는데, 양산에서도 100년 만에 처음으로 지난 9일 신평 하북 만세운동 재현행사가 펼쳐져 눈길을 끌었다. 이에 앞서 지난 8일 (사)양산항일독립운동기념사업회 주관 ‘하북 신평 만세운동 100주년 학술대회’가 열렸다. 동부경남 최초의 만세운동인 신평 만세운동을 조명한 첫 번째 학술대회로, 학계와 지역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그 가운데 향토사학자 이병길 씨가 발제한 ‘통도사 신평 독립만세운동과 의의 그리고 주역들의 삶’의 내용을 정리해 보도한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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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 신평 독립만세운동의 역사적 의의
이제까지 양산 신평 만세운동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가장 단순한 이유는 당시 어떤 기록에도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구체적인 사건 전개나 주모자 등에 대한 객관적인 자료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사건 피해자 역시 다른 지역에 비해 거의 없다. 단지 만세운동과 관련한 핵심 단어는 오택언뿐이다. 나머지는 전해오는 이야기였다. 이야기는 사실일 수도 있고, 거짓일 수도 있고, 과장일 수도 있다. 사건 연루자에 대한 연구 또한 빈약했던 것도 사실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통도사 신평 독립만세운동은 외면받아 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이유가 역으로 의미를 지닌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통도사 신평 독립만세운동 의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신평 독립만세운동은 경남도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만세운동이다. 양산시 하북면 신평마을은 지역적으로 양산의 가장 외곽에 있고, 또 국지대찰인 통도사가 있기에 사하촌으로 널리 알려지지 않은 지명이다. 당시 하북면 신평마을은 면사무소가 이전한 지 1년이 됐고, 하북주재소는 현 부도원 지역에 만들어진 지 열흘 정도 지났고, 우편소도 없는 전형적인 빈촌인 면소재지였다. 교통도 또한 발달하지 않는 곳이었다. 근대 문명의 혜택이 닿지 않은 곳이기에 역설적으로 신평 독립만세운동은 널리 알려지지 않고 일어날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실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지역 주민이 이구동성으로 3월 13일 만세운동이 일어났음을 증언하고 있다.
둘째, 신평 독립만세 운동 주축은 통도사 스님들이었다. 스님들은 은밀하고, 치밀했기에 큰 피해가 없는 만세운동을 할 수 있었다. 통도사 인근 울주군 언양 4.2만세운동은 천도교인들이 중심이 돼 일으킨 만세운동이다. 통도사는 통도사 명신학교와 지방학림, 강원이 있었기에 마을 주민보다 먼저 신교육의 영향을 받았다. 조선 500년 동안 침체했던 불교가 기지개를 켜고 새로운 사회운동 주역을 키우기 위해 양산에서 근대 교육의 첫 출발을 했다. 시골이었지만, 만세운동을 할 인적 요소를 갖추고 있었다. 통도사는 만해 한용운을 비롯한 불교계 만세운동을 확장한 불보사찰이요, 국지대찰이다. 이는 통도사 법맥이 임란 때 승병을 크게 일으킨 서산(西山) 휴정선사(休靜禪師)로부터 시작함이 우연이 아닐 것이다.
셋째, 신평 독립만세운동은 일회성에 그치지 않았다. 신평 독립만세운동은 서울 만세운동을 이어받았다. 하지만 이에 그치지 않고 다시 신평에서 5월 4일 주민 400여명이 모여 다시 만세운동이 일어나 지도부 지휘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행동하고, 일본 헌병 무기를 빼앗고 언양까지 진출했다.-신한민보, 1919년 6월 21일. 신한민보는 미국에서 발행한 신문이라 내용이 부정확하고 과장돼 있다. 이는 독립 의지를 널리 알리고 독립군 자금 모금에 긍정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봤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다음은 신문기사를 해독해 옮긴 것이다. “5월 4일 양산 통도사에서 400여명 독립단 민중이 일어나 아무런 병기도 없이 다만 손에 국기를 들고 질서 있게 진을 치며 운동을 거행했다. 그 길로 양산군으로 들어가고, 또 언양까지 이르니 독립군 수효가 점점 늘어나 약 10만명에 달했다. 그 활동은 지극히 맹렬해 450명 왜병이 있으나 감히 총도 쏘지 못하고 피하며 달아났다. 우리 독립군은 왜병을 따라가 군기를 모두 빼앗고, 군용품을 무수히 얻었다. 왜놈을 하나도 죽이지 않고 다만 가지런히 했다. 또한 우리 독립군은 지휘나 운동이 지극히 정제해 모이고 헤어짐도 두령의 지휘대로 했다”- 통도사 만세운동은 종교적으로는 3월 31일 해인사, 4월 4일 표충사 스님들 만세운동에 영향을 줬다. 그리고 성공적인 만세운동은 은밀하게 퍼져 이웃 고을인 양산과 언양까지 알려졌다. 양산에서는 전병건과 엄주태가 주동이 돼 양산장날인 3월 27일에 만세시위를 벌였다. 또 4월 1일 이귀수와 류계문 등이 주동이 돼 2천여명이 모여 2차 만세운동을 벌였다. 이 밖에 4월 2일 언양장터 만세시위에도 영향을 줬다.
넷째, 신평 독립만세운동은 피해자가 적었다. 이후 통도사 스님들 항일독립운동의 불씨가 됐다. 통도사 독립운동 스님들은 오택언, 양대응, 김상문, 신화수 스님 그리고 통도사 출신인 박민오 스님 등이 있다. 오택언 스님은 징역 8개월 출옥 후 스님으로서, 1920년대는 진주와 마산포교사로, 1930년대는 통도사 감사와 조선불교중앙교무원 심사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양대응 스님은 왜색불교의 침입을 막기 위해 친일승려 강대련을 몰아내고자 ‘명고축출(鳴鼓逐出)’ 사건을 주도해 4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만해 스님의 만당(卍堂)에도 관계했기에 구하 스님으로부터 독립자금을 받기도 했다. 신화수 스님은 통도사 수말사인 옥천사 출신이기에 통도사 스님이라 할 수 있다. 그는 통도사 출신 박민오, 김상옥 등과 같이 ‘혁신단’에 가입하고 ‘혁신공보’를 발행한다. 의열단원 김상옥, 대동단과 관련한 ‘육혈포 암살단’ 사건에 연루돼 2년의 옥고를 치른다. 그리고 이후 김상옥의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과 관련해 의열단 활동을 했던 사실이 드러났다. 그는 또 박민오와 같이 진주에서 시도한 ‘제2차 독립운동 사건에 관계한다. 이 사건에 양산 하북면 지산리의 자동차 운전수인 김봉길(25, 징역 1년), 양산 남부리 시장 포목상인 서상건(23, 불기소 처분),- 서상건(1899~1960)은 1920년대 양산청년회, 양산청년동맹, 신간회 양산지회 임원으로, 1930년 양산협동조합 창립 발기인으로 활동했다- 잡화상인 김덕봉(24, 징역 1년)이 관련된 점이 특이점이다. 이들은 아마 통도사 명신학교 혹은 보통학교에서 인연을 맺은 사이일 수도 있다. 박민오(노용)는 통도사 스님 출신이자 중앙학교 학생으로 불교계 학생들의 3.1운동 행동대장 역할을 했다. 이후는 항일독립운동을 널리 알리기 위한 ‘혁신공보’와 ‘자유신종보’를 발간했다. 특히 김상옥, 깁법린, 백초월 스님과 관계하면서 ‘혁신공보’를 발간하는 가운데 ‘제2차 독립운동’을 도모하며 상해 임시정부와도 깊은 관련을 맺었다.
다섯째, 신평 독립만세운동은 통도중학교 배일 교육의 토대가 됐다. 통도사 신평 독립만세운동은 이 지역 항일 독립운동 사상을 고취하는 역할을 했다. 1919년 11월 15일 ‘대한승려연합회 독립선언서’가 발표된다. 선언 기초자는 백초월, 신상완 스님이고 선언자는 통도사 김축산(김구하), 범어사 오만광(오성월) 등 12명이었다.-상해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1920년 3월 1일- 친일승이라 비난받을 수 있는 구하 스님 삶의 전환점이었다. 그리고 훗날 1941년 통도중학교 배일교육 사건이 일어나는 원천이었다. 김말복(징역 2년), 조병구(징역 2년), 신정균(불기소), 배기철 선생(불기소)이 끌려가 고문을 당했고, 양대응 스님도 고초를 겪었다. 배기철을 제외하고는 모두 통도사 출신 스님이었다. 배기철은 해방 후 조봉암, 강정택과 함께 남한의 농지개혁을 주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