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3.1만세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에서 다양한 기념행사가 열렸는데, 양산에서도 100년 만에 처음으로 지난 9일 신평 하북 만세운동 재현행사가 펼쳐져 눈길을 끌었다. 이에 앞서 지난 8일 (사)양산항일독립운동기념사업회 주관 ‘하북 신평 만세운동 100주년 학술대회’가 열렸다. 동부경남 최초의 만세운동인 신평 만세운동을 조명한 첫 번째 학술대회로, 학계와 지역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그 가운데 향토사학자 이병길 씨가 발제한 ‘통도사 신평 독립만세운동과 의의 그리고 주역들의 삶’의 내용을 정리해 보도한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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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 이어> 3월 13일 신평 장터에 사람이 모여들었다. 신평마을은 작지만 인근 하북면 사람이 모두 모이는 유일한 공간이자 장터다. 시장은 물류와 정보의 유통공간이다. 신평시장은 멀리는 영축산 너머 배내마을 사람이, 가까이는 상북면 사람과 울주군 삼남면ㆍ삼동면 사람이 장을 보러오는 곳이다. 그래서 작은 장터지만, 장날만 되면 사람이 북적이는 곳이었다. 장날이면 스님들도 자연히 필요한 물건을 구입ㆍ구경하거나 포교하러 시장에 오기도 했다.
↑↑ 지난 3월 9일 열린 신평 만세운동 재현행사 |
ⓒ 양산시민신문 |
1천200여평 장터-조선총독부 경상남도 고시 제30호(1932년 3월 22일)에 따르면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순지리에 소재한 신평시장 면적이 1천211평에서 1천316평으로 바뀌고 지번은 576번지, 576-4번지, 576-3번지, 732-3번로 변경된다. 현재 신평장터 규모와 거의 일치하고 있다-에는 줄다리기를 구경하기 위해 마을 주민과 일부 장꾼, 스님 등 수백명이 모여들었다. 줄다리기는 시장 동쪽 도로에서 열렸다. 인근 심상소학교 마당에 사람들이 구경하기 위해 모였다. 시장 동쪽 거리에 짚으로 만든 밧줄을 놓고 많은 사람이 모였다.-줄다리기설: 신평 만세사건 현장 목격자 김달우(1905년 12월 9일생) 증언
주모자인 양대응 스님은 사람의 이목을 모으기 위해 땔감으로 쓰는 나뭇짐을 장터에 몇 짐 가져다 놓고 짚을 포개 불을 지른 뒤 ‘불이야’라고 소리를 질렀다.-지게 방화설: 통도사 방장 성파 스님 증언(양산시민신문, 2019년 2월 20일)
불교전수부 학생이 독립선언서를 낭독ㆍ연설하고 배포했다. 학생 가운데 일부는 교모에 붉은 띠를 매고 사람들을 인도하며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좁은 지역이었지만 순식간에 신평장터 일대는 독립만세 함성이 울려 퍼졌다. 만세운동은 장터에서 시작해 지금의 신평중앙길을 따라 통도사 산문에까지 진행했을 것으로 짐작한다. 처음에 신평마을 주민은 만세 소리에 놀랐지만, 이윽고 동참하며 ‘대한독립만세!’를 목청껏 불렀다. 인원도 소규모였기 때문에 번개 같은 만세운동이 일어날 수 있었다.
만세운동이 한창 진행 중일 때, 비로소 통도사 경내에 있었던 통도사주재소-1919년 3월 1일 통도사 경내에 하북주재소를 신설했다가 얼마 뒤 현재 위치로 옮겼다(하북면지 1996년, 99쪽), 아마 만세운동 이후 옮겼으리라 짐작한다- 순경들이 소식을 듣고 출동했다. 주재소가 3월 1일 개소했기에 다소 익숙하지 않은 곳이어서 순경들도 허둥댔다. 또 장날에 경비를 강화하려는 것인데, 만세운동이 전날 이뤄져 허를 찌른 측면도 있었다. 출동한 뒤에는 이미 만세운동은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고, 군중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당시 하북면에는 헌병 파견소가 없어 상황 보고가 면사무소나 우편소를 통해 이뤄졌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양산우체국은 1909년 9월 1일 만들어졌으나 하북우체국-하북우체국 역사 기록이 하북면지에 각각 다르다. 1996년 발행 판(98쪽)은 “1962년 5월 15일 양산우체국 하북 1분국 설치, 1964년 6월 9일 하북우체국 설치, 1968년 6월 1일 통도사우체국 개칭, 1980년 12월 31일 일반국으로 승격”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2012년 발행 판(251쪽)에는 “1964년 10월 10일 하북우체국 개국, 1991년 12월 26일 통도사우체국으로 개칭”으로 기록하고 있다-은 1964년 6월 설립됐다. 따라서 면사무소만 있었기에 헌병 경찰 파견은 더 늦었을 것이다. 하지만 주모자 격인 김진옥(오)은 잡혔다. 다른 주모자인 신화수는 서울로, 김상문은 상해로, 박세문은 일본 고베로, 양대응은 모처로 피신했다.
↑↑ 1930년대 신평마을 |
ⓒ 양산시민신문 |
조선헌병사령부는 신평 만세운동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경성에서 발발한 소요에 해인사로부터 서울에 가 있던 승려 백용성 등이 이미 관계하고 있었으므로, 특히 일반 승려계에 대한 주의를 몇 배 더 기울였다. 그러던 중 마침내 3월 29일 양산 하북면 신평시장에서 통도사 부속 보통학생 및 지방학림 생도 40~50명, 동 불교전수부 생도 약 10명, 그리고 불령 승려 약 10명이 주모자가 돼 시위운동을 감행했다. 특히 불교전수부 생도는 독립선언서 낭독ㆍ연설 및 배포에 힘썼다. 그리고 동 인쇄물은 통도사로부터 경성 중앙학림에 입학 중인 오택언(당시 전보 수배에 의해 총감부에 신병 송치)이 경성으로부터 몰래 가지고 돌아와 타인을 선동한 사실이 있었으나, 통도사 주직(住職, 주지)은 전형 통모(通謀) 관련한 사실이 없다. 3월 31일 합천군 해인사 구내ㆍ외에서 해인사지방학림 생도가 주모자가 돼 부근 농민과 함께 시위운동을 감행했다. … 또 양산군 통도사가 먼저 이 운동을 했다는 것을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결행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어, 마치 형식적으로 결행한 것 같은 바, 이 절 주지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조선헌병사령부,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1984), 608~609쪽. 이 자료는 1919년 8월 조선 헌병대사령부가 작성한 각 도의 3.1운동에 대한 종합보고서다. 일제의 보고이기에 객관성을 가지고 있지만, 오류도 있다.<다음 호에 계속>
정리_홍성현 기자 redcastle@ys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