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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통도사 신평 독립만세운동의 전개..
기획/특집

통도사 신평 독립만세운동의 전개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19/05/07 10:20 수정 2019.05.07 10:20

■ 통도사 신평 독립만세운동과 의의 그리고 주역들의 삶

올해는 3.1만세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에서 다양한 기념행사가 열렸는데, 양산에서도 100년 만에 처음으로 지난 9일 신평 하북 만세운동 재현행사가 펼쳐져 눈길을 끌었다. 이에 앞서 지난 8일 (사)양산항일독립운동기념사업회 주관 ‘하북 신평 만세운동 100주년 학술대회’가 열렸다. 동부경남 최초의 만세운동인 신평 만세운동을 조명한 첫 번째 학술대회로, 학계와 지역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그 가운데 향토사학자 이병길 씨가 발제한 ‘통도사 신평 독립만세운동과 의의 그리고 주역들의 삶’의 내용을 정리해 보도한다. 편집자 주


오택언의 통도사 행

ⓒ 양산시민신문


<지난 호에 이어> 서울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은 3월 10일을 전후로 경상도ㆍ전라도ㆍ강원도ㆍ충청도로 확산해 전국적인 규모로 발전했다. 그리고 3월 6일에는 만주의 서간도에서, 13일에는 북간도에서 시베리아 연해주, 나아가 미주지역까지 파급됐다. 이러한 운동이 중앙지도부 없이 조직적으로 확산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학생들이었다. 주위 사람들을 포섭해 일시적인 시위ㆍ봉기를 조직하기도 했고, 그 과정에서 각종 비밀결사대를 조직해 시위를 준비하고 이끌어 갔다.

3월 1일 서울 만세운동을 한 후 오택언은 고향 양산 통도사로 내려온다. 3월 1일이 토요일이었기에 아마 그는 일요일과 월요일 만세운동 여파를 살피고 3월 3일 또는 4일 중에 우체국에 가서 통도사로 독립선언서를 우편 발송했을 것이다. 네 장을 신구담과 신화수를 수취인으로 했다. 몸에 소지하고 양산으로 간다는 것은 일경의 불심검문에 걸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안전하게 우편 발송을 택했다.

오택언(1897~1970)은 범어사로 향한 김법린(1899~1964), 김상헌(1893~1945)과 동행해 경부선 기차를 타고 내려왔을 수 있다. 양산 출신 범어사 스님인 김상헌-김상헌(1893~1945): 서울 3.1운동 후 부산 동래 범어사에서 김법린과 3월 만세운동을 했다. 신상완, 백성욱 등이 주동한 ‘혁신공보(革新公報)’라는 비밀 독립신문을 김상호와 함께 여러 지역으로 배포하고 정보수집 활동을 했다. 신상완으로부터 국내 유력 승려를 상해로 보내 달라는 밀지를 받고, 김포광(金包光)을 대동해 상해 임시정부에 갔다가 신상완과 함께 귀국했다. 1919년 8월께 철원 애국단을 조직하고 군자금과 조선 지도를 구입해 상해 임시정부에 보냈다. 1920년 4월 6일 신상완과 함께 철원 애국단 사건으로 종로경찰서에 체포돼 1921년 3월 경성복심원에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은 오택언과는 동향이자 중앙학림 동기다. 나이 차이가 있어도 친한 사이였을 것이다. 이들 세 명은 부산행 기차를 타고 내려오면서 이런저런 독립운동을 논의했을 수도 있다. 같이 왔다면 만세운동 거사 일을 같이 하기로 했을 가능성도 있다. 동래와 신평장날이 3일과 8일로 같기 때문이다. 실제로 범어사 만세운동이 3월 7일(8일?) 일어났다. 이들은 오택언보다 앞선 3월 3일(월) 정도 내려왔을 수도 있다.

3월 5일(수) 오택언은 경성에서 기차를 타고 물금을 경유해 통도사로 돌아왔다. 오택언이 만난 사람은 아마도 지방학림 학생과 강원 스님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오택언은 서울에 있었던 3.1만세운동 목적과 경과 과정 등을 설명했다. 그 당시 만난 사람은 보통학교와 지방학림 학생대표 김상문을 비롯한 양대응, 김진오(옥), 신화수 스님과 면사무소 직원 박세문이었다. 오택언(1897년생), 신화수(1896년생), 양대응(1897년생) 스님과는 나이가 거의 같다. 또 김상문(1893년생) 스님과 박세문(1894년생)의 나이가 거의 같다. 아마 오택언의 말을 들은 김상문이 박세문의 도움을 얻기 위해 불렀을 것이다. 이들은 사안의 중대성에 비춰 비밀리에 모든 것을 논의했다.

하지만 오택언은 이미 전보 수배령이 내려져 있어 체포는 시간문제였다. 당시 통도사주재소가 통도사에 있었기에 서울에서 온 그의 정체는 곧 드러나 3월 7일(금) 검거돼 서울로 압송됐다.

통도사 스님들의 비밀모의

오택언이 검거됐지만, 통도사 만세 운동은 중단되지 않았다. 오택언이 선택한 신의 한 수였던 독립선언서가 오택언이 검거된 2~3일 후 통도사 신구담과 신화수에게 배달된다. 우편 업무 처리 과정은 다음과 같다. 발송인→접수→수집→정리→소인(消印)→구분→묶음→체결→운송→개낭(開囊)→배달→수취인의 과정을 거친다. 당시 교통체계로 본다면 서울→물금→통도사까지는 최소 4일은 걸린다. 우정박물관 등에 1919년 당시의 우편배달 기간이나 경로를 알 수 있는 자료는 없다. 물금 우편소가 1909년 3월 1일 설치됐다.

통도사주재소는 현재 부도원 인근에 있었다. 가장 은밀하게 외부로 노출되지 않게 비밀모의를 할 수 있는 장소로 사찰 같은 종교시설만큼이나 좋은 곳은 없다. 그리고 학교는 인쇄, 출판, 그리기 등 모든 것이 가능한 장소였다. 만세운동에 가장 필수적인 것은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다. 무엇보다 독립선언서가 있어야 했다. 오택언이 직접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왔을 수도 있지만, 우편으로 받은 독립선언서가 네 장에 불과하기에 등사가 필요했다. 등사는 박세문이 근무했던 하북면사무소와 지방학림 학교 등사기를 이용했을 것으로 짐작한다. 박세문이 통도사로 면사무소 물건을 반입하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독립선언서 한 장을 인쇄하는데 미농지 세 장이 소요된다. 등사기, 등사 잉크, 종이 등은 학교나 면사무소에서 조달했다.

오택언 검거에 따라 만세운동 계획은 더 급하게 진행됐다. 혹시 오택언이 만세 사건 관련 사실을 누설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실상 오택언은 심문, 재판 과정에서 신평 만세운동에 관해 일체 진술한 것이 없다.

오택언은 통도사로 독립선언서 우편 발송 사실을 진술했다. 이 때문에 경찰이 통도사를 수색했기에 신구담과 신화수는 도피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오택언 재판이 3월 14일 시작한다는 소식이 알려짐으로 통도사 스님들은 만세운동을 진행할 수 있었다.

통도사 스님들은 당시 신평지역 인구가 많지 않음으로 신평장날을 기해 독립만세운동을 하기로 결의했다. 하지만 오택언 검거로 3월 9일(음 2월 8일) 장날은 어렵고, 다음 장날인 14일(음 2월 13일)을 택하기로 했다. 그런데 마을에서 장날 전날인 13일 줄다리기를 하는 행사가 예정돼 있었다. 장날만큼은 아니더라도 마을 주민이 모일 수 있는 날이었다. 자연스럽게 사람이 모이는 날을 택하는 것이 일본 경찰의 관심이 많은 장날을 피할 수 있기 때문에 3월 13일(목, 음 2월 12일) 장날 전날에 행하기로 했다. 주모자 스님들은 동원 가능한 사람들은 비밀리에 지방학림 학생과 강원 그리고 젊은 스님 중심으로 연락을 했고, 노장 스님들에게는 비밀에 부쳤다.

당시 주모자인 양대응 스님 등이 또 노장 스님들에게 만세운동 사실을 알리지 않은 것은 이후에 일어날 수 있는 통도사에 미칠 영향 등을 감안했을 것으로 보인다.<다음 호에 계속>

정리_홍성현 기자 redcastle@ys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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