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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통도사 신평 독립만세운동의 배경..
기획/특집

통도사 신평 독립만세운동의 배경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19/04/16 10:21 수정 2019.05.07 10:21

■ 통도사 신평 독립만세운동과 의의 그리고 주역들의 삶

올해는 3.1만세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에서 다양한 기념행사가 열렸는데, 양산에서도 100년 만에 처음으로 지난 9일 신평 하북 만세운동 재현행사가 펼쳐져 눈길을 끌었다. 이에 앞서 지난 8일 (사)양산항일독립운동기념사업회 주관 ‘하북 신평 만세운동 100주년 학술대회’가 열렸다. 동부경남 최초의 만세운동인 신평 만세운동을 조명한 첫 번째 학술대회로, 학계와 지역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그 가운데 향토사학자 이병길 씨가 발제한 ‘통도사 신평 독립만세운동과 의의 그리고 주역들의 삶’의 내용을 정리해 보도한다. 

통도사 명신학교

<지난 호에 이어> 성해 스님은 또 1906년 4월 1일 통도사에 ‘명신학교(明新學校)’를 설립했다. 1906년 6월 3일 학감(學監)은 구하 스님이었다.-1924년 통도사 주지 취직인가의 김구하 스님 수행 이력서(『축산구하대종사 민족불교운동 사료집』 (상권), 713쪽)- 2년제 학교로 학교 건물이 따로 없었고 통도사 화엄전과 만세루의 큰 방을 교실로 사용했다. 양산시 초등교육 시초로 현재 하북초등학교의 전신이라 할 수 있다. 1910년 생도들은 원통방을 기숙사로 사용했다. 

명신학교는 승려에게 필요한 불교학과 경전 이외에 신교육도 했으며, 심지어 일본인 교사도 채용했다. 1908년 11월 5일 대한매일신보를 보면, 당시 명신학교 교장은 윤치오(尹致旿, 1869~1950), 부교장 서해담, 학감 김천보(구하)였고, 생도는 103명에 달했다. 윤치오는 2년 동안 교장으로 있다가 1911년 서울중앙학교 교장으로 자리를 옮긴다.-통도사 명신학교 출신이 서울 중앙학교로 진학에 유리했을 것이다. 박민오가 그 예다- 1909년 2월 칠순의 서금성 스님이 자신의 답(沓) 26두락(斗落) 5승(升)을 기부하는 미담을 부교장 이남파가 광고한다.-대한매일신보, 1909년 2월 20일- 1909년 5월 9일 김구하는 학감을 사직한다. 1910년 1월 학감 장청호, 교감 송설우로 바뀌고 2학기 졸업시험을 치는데 수백명이 와서 보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1910년 3월 졸업시험 합격생은 최경진, 신인호, 김선우, 김정석, 신병환, 손영희 6명이었다.-대한매일신보, 1910년 3월 16일, 졸업생 김정석(靖錫)은 경봉 스님(1892~1982) 법명이다. 스님은 1908년 4월 입학해 1910년 3월 졸업했다- 1910년 6월 석탄일에 학도 80여명 모집을 광고하며 부교장 김고산, 감독 김성해 스님이 열심히 보통교육을 했다. 1910년 7월 명신학교 제5학년 제1학기 갑ㆍ을ㆍ병ㆍ정 4개 반 급제생은 총 25명으로 오택언은 병과 우등생이었다.-대한매일신보, 1910년 7월 17일 5학년은 5회 입학생을 의미하는 듯하다- 9월에는 졸업생 김철희를 교사로 임명한다.

이후 통도사 주지에 취임한 구하 스님이 1911년 11월 11일 조선총독부로부터 통도사 사립불교명신학교 설립자로 인가받았고, 1913년 3월 8일 교장으로 인가받아 불교교육 발전에 힘썼다. 또한 그는 1917년 1월 2일 불교중앙학림장에 임명되고, 1918년 8월 10일 사립 경성 불교중앙학림장 설립자로 인가받는다. 구하 스님을 불교계 근대 교육의 선구자라 할 수 있다.

2년제 과정 명신학교는 통도사 스님 교육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 자녀 80~100여명의 학생이 신학문 교육을 받는 보통학교 기능을 한 양산지역 근대교육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양산 최초 사립학교는 1911년 5월 1일 개교한 양산초등학교다. 그 후 1919년 2월 1일 삼성초등학교가 개교했다- 1917년 통도사 본ㆍ말사에 보통학교 학생이 60명 있었다는 기록으로 봐 통도사 명신학교가 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명신학교가 언제 폐교했는지는 알 수 없다.-신평만세운동의 ‘줄다리기 설’의 증언자 김달우(1905년생)에 따르면, 당시에 심상소학교가 있었다고 한다. 하북면 초산 못 근처에 ‘송덕교주수등정무군지비 (頌德校主須縢政茂君之碑)’가 있다.‘대정 14년 4월 14일 졸거(大正 十四年 四月十四日 卒去), 대정 15년 석가탄생일 유지 건립(大正 十五年 釋迦誕生日 有志 健立)’이라 뒷면에 새겨져 있다. 학교 건립 일본인 유공자의 송덕비이다. 1925년 세운 비석이다. 신평마을 신충길(1944년생)은 원래 1970년 중반 채봉들에 있던 것을 옮긴 것이며, 초산마을 윤장우(1921년생)에게서 ‘신평 심상소학교’와 관련한 것이며, 글씨는 구하 스님의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하북면지(1996)』에 따르면, 1936년 1월~1943년 7월까지 1931년 4월 1일 개교한 하북공립보통학교가 신평공립심상소학교로 교명을 변경 운영했다.(182쪽)- 통도사 지방학림 학생 입학 조건이 보통학교 졸업자이기에 명신학교는 어느 시기까지 명맥을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 1910년대 당시 통도사 모습과 통도사 지방학림 위치(빨간색 네모)
ⓒ 양산시민신문

통도사 지방학림

1914년에 접어들어 중등교육기관을 설치하고자 ‘전국30본산 연합 사무소’를 발족하고 1915년 2월 <연합 제규>를 제정한다. 제13조에 연합사찰과 그 말사 승려들에게 종교와 기타 필요한 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서울에 중앙학림(고등학교 과정)을, 각 본사에는 지방학림(중학교 과정)을 설치한다고 명시했다.

1915년 7월 3일 전국 30본산 연합사무소에서 통도사 지방학림을 비롯한 각 지방학림 학칙 강령 승인안을 조선 총독부에 제출하고 1915년 7월 15일 승인받았다. 양산중학교가 1939년 5월 1일 개교했으니 통도사 지방학림이 양산 최초 중학교라 할 수 있다. 통도사 지방학림은 1916년 4월 1일 개교했다. 입학 자격은 13세 이상 보통학교 졸업자(동등 학력)로, 1년 3학기제로 3년 수업하며, 승려에게 필요한 학과를 교수하며 지덕을 높이고 중앙학림에 입학함을 목적으로 했다.

지방학림 교실은 통도사 천자각이었다. 초대 교장은 통도사 주지 김구하였다. 학감에는 신태호, 교사로 김월제, 정택, 최병 등이었다. 학생은 승려로 신도들 자녀는 배제했다. 하지만 일부 신도나 사하촌 재가자 자녀도 다녔다고 볼 수 있다. 학년 10~15명 내외로 전교생은 3~40명 정도였다. 엄격한 계율에 의한 신앙생활과 학교공부를 같이 했고, 교복은 따로 없었다. 한복 바지저고리 위에 두루마기를 입었고, 모자는 검은색 학생모에 흰 테를 둘렀고 만(卍)자에 무궁화 가지를 두른 모표를 달고 등ㆍ하교와 외출 때 쓰고 다녔다.

1919년 당시 통도사 지방학림 출신으로 김포광(金包光), 신경수(辛景壽), 하민호(河旼昊), 양대응(梁大應, 1897~1970), 오택언(吳澤彦, 1897~1970), 김상문(金祥文, 1893~1951) 등이 알려져 있다. 지방학림 폐교는 알 수 없으나 1922년 2월 6일 조선총독부 신교육령 공포와 통도사 내부의 보수와 혁신 세력, 신진과 노장의 갈등 등으로 1925년께 폐교된 것으로 보인다.-통도사 관련 학교 자료는 『영축학원 10년사』(학교법인 영산학원, 보광중고등학교, 1985), 『영축총림 근현대 불교사(상권)』(영축총림 통도사, 2010), 『양산시지(상권)』(양산시지편집위원회, 2004) 등을 기본적으로 참조함.

지방학림을 계승한 학교가 1934년 4월 1일 개교한 통도중학교다. 교사는 현 통도사 성보박물관 자리에 있었다. 운동장은 삼성반월교 너머 현재 주차장 자리다.

통도사 지방학림은 서울 중앙학림에 진학해 훗날 일제강점기 불교청년활동의 주축이 된다. 이들이 바로 한용운, 백초월 등과 같이 항일독립운동을 이끈 불교계 중심 인물들이다.

1917년 통도사 본ㆍ말사 학생 수는 보통학교 학생 60명, 지방학림 학생 35명, 전문강원 학생 58명으로 모두 153명이다.-『한국근세불교백년사, 제2권(교육편년)』, 1994. 민족사, 27쪽- 본ㆍ말사 승려는 604명, 비구니는 72명이었고 남자 신도는 8천830명, 여자 신도는 5천138명이었다.-한동민, 『사찰령 체제 하 본산제도 연구』, 정앙대 박사 논문, 2005, 221쪽. 1926년 통도사 사찰은 85개, 승려 604명, 비구는 60명 등 모두 709명이 있었다- 1924년과 1926년 통도사 주지 선거에 투표한 스님은 49명과 47명이었다. 1919년 3월 당시 통도사에 있었던 스님과 학생은 최소 200여명은 되리라고 보인다.<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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