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도사 신평 독립만세운동과 의의 그리고 주역들의 삶
올해는 3.1만세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에서 다양한 기념행사가 열렸는데, 양산에서도 100년 만에 처음으로 지난 9일 신평 하북 만세운동 재현행사가 펼쳐져 눈길을 끌었다. 이에 앞서 지난 8일 (사)양산항일독립운동기념사업회 주관 ‘하북 신평 만세운동 100주년 학술대회’가 열렸다. 동부경남 최초의 만세운동인 신평 만세운동을 조명한 첫 번째 학술대회로, 학계와 지역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그 가운데 향토사학자 이병길 씨가 발제한 ‘통도사 신평 독립만세운동과 의의 그리고 주역들의 삶’의 내용을 정리해 보도한다.
편집자 주
통도사 신평 독립만세운동의 배경
양산시 하북면 순지리와 지산리는 산외, 산내 지역으로 통도사 사하촌(寺下村)이다. 이 마을이 본격적으로 형성된 것은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통도사를 창건한 646년 즈음이었을 것이다. 사원(寺院) 경제(經制)를 위해 국왕에 의한 사원전(寺院田)이 사급(賜給)되고 사원에 예속된 농민, 부목(負木) 등이 인근 지역에 거주하면서 본격적으로 사하촌이 형성됐다.
고려시대에는 대규모 사원 영토인 장원(莊園)이 설치되면서 취락 수나 규모가 확대했고, 조선시대에 이르러 장원이 와해하면서 사원과의 관계가 토지를 매개로 한 경제적 관계인 지주-소작농으로 전환됐다. 일제강점기에도 여전히 토지를 매개로 한 사하촌 취락 형태는 유지됐다. 다만 통도사가 일제강점기에 억불숭유의 종교적 제한이 풀리자 관광객 등이 증가해 단순한 토지 중심 취락 구조는 변했다고 할 수 있다.
신평마을 현황
1910년 일본제국주의는 조선을 식민지로 한다. 1918년까지 식민지의 경제적 수탈을 위한 토지조사사업을 시행하고, 통치 효율성을 도모하기 위해 1914년 행정적으로 지방 제도를 전면 개편했다.
현재 하북면 면적은 양산 전체의 14%인 68.65㎢다. 전체 면적에서 농경지는 6.8%, 임야는 80.6%, 대지는 1.2%, 기타 8.6%다. 대부분 임야로, 농지는 적고 그만큼 인구분포도 낮은 편으로 1970년대까지 양산 인구의 10% 내외를 차지했다. 또한 하북면은 1914년 17개 리에서 8개 리로 개편됐고, 1918년 면소재지는 성천동(현 답곡리 성천마을)에서 순지동(현 순지리 신평마을)으로 이전했다. 순지동은 신평동과 순지동을 합했다.
1914년 양산시 전체 인구는 3만5천803명이다. 1923년 양산읍은 2천509명이고 물금은 1천549명이었다. 1960년 양산 전체 인구는 5만5천719명이다. 그중 하북면은 6천596명으로 전체 인구의 11.8%를 점하고 있다.-양산시지편찬위원회, 『양산시지(梁山市誌)(상권)』, 2004, 426쪽 등 참조
1981년 하북면 총인구 7천715명 가운데 지산리는 11.3%, 신평은 29.7%였다. 지산리는 주로 농업을, 신평은 서비스업에 종사했다.-이영백, 「사하취락에 관한 연구-통도사 주변을 중심으로」, 석사학위 논문, 동국대, 1982. 5쪽.
하북면에 학교가 들어선 것은 하북초등학교가 1931년, 통도중학교가 1934년 개교한다. 내원사 인근 용연초등학교가 1943년이다. 그만큼 학교 다닐 인구가 적었다. 양산시에서 가장 발전이 느린 지역이고 사하촌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1919년 하북면 인구는 3천500명 내외로 보인다. 따라서 통도사가 있는 하북면 순지리와 지산리 전체 인구는 많아야 1천명 정도로 볼 수 있다.
1910년대 신평마을 일대는 통도천 주변을 중심으로 괴촌(塊村) 형태 마을이 형성됐다가 1918년 면사무소가 성천마을에서 옮겨오고 신작로가 개설되면서 현재 순지리의 ‘신평중앙길’을 중심으로 가촌(街村) 촌락이 형성됐다.-주거지와 경지가 떨어진 경우에는 취락의 실제 거주 밀집도는 일정 장소에 모이는데 이를 집촌(集村)이라고 한다. 토지 소유 경계와 도로 위치, 인구의 가옥에 따라 달라지는데 크게 괴촌, 가촌, 환촌으로 나뉜다. 도로의 직강화가 이뤄지지 않거나 불규칙하게 위치하는 촌락에서는 나타나는 주거 형태를 괴촌(塊村)이라고 한다. 그에 비해 밀집도가 도로와 나란한 촌락은 가촌(街村), 취락이 넓은 목초지나 중심지를 가운데 주고 둥글게 만들어진 집촌을 환촌(環村)이라고 한다. 또 인구가 모여있는 경우를 집촌(集村), 흩어져 있는 경우를 산촌(散村)이라고 한다.
즉, 중앙로에서 산문 입구까지 도로 좌우에 건물이 쭉 이어져 있는 형태였고, 나머지 주변 지역은 논밭이었다. 1918년 면사무소가 들어서고, 1931년 하북초등학교가 들어선다. 결국 1920년 이후에 통도사 인근 마을은 점차 근대적 마을로 변하고 인구도 증가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1919년 당시는 정말 한적한 사하촌이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하북파출소는 연혁에 따르면 1919년 3월 1일 통도사주재소로 경내에 있었고, 그 후 신평마을 현 위치로 옮겼다. 1945년 8월 15일 하북지서, 1995년 1월 27일 하북파출소로 개칭했다. 우편소는 없었다. 1909년 3월 1일 물금우편소가, 그해 9월 1일 양산우체국이 설치됐다. 전신업무는 1913년 1월 1일 양산우체국에, 통도사지역은 1964년 전신전화업무가 시작된다.-1978년 전화국 근무자 증언에 따르면 신평 삼거리에서 통도사 방향 50m 왼쪽에 전화국 직원이 우체국 안에 상주하며 자석식 교환대를 사용했다고 한다. 1964년 하북우체국 개국과 함께 전신전화ㆍ우편업무가 동시에 진행됐다. 통도사 전화는 1967년 5월 6일 개통됐다.(양산KT 지부장 김수택 조사, 2019년 2월 25일)
1919년 당시 통도사 신평마을에는 전신 전화가 들어오지 않았다. 따라서 통도사 신평마을에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차량을 이용해 양산읍내까지 가야 했다.
신평시장은 현재 신평터미널이 개발되기 전까지 마을 중심지역이었다. 신평시장 규모는 1910년 이래 현재까지 큰 변화가 없다. 장옥 형태 시장이 아직도 그 기본적인 모습을 갖추고 있다. 다만 주변 소방도로가 개설ㆍ확장되면서 노점이 늘어난 것을 제외하고 지금의 건물이 있는 것 외는 달라진 것이 없다. 장날은 3, 8일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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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통도사 산문 |
ⓒ 양산시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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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 한국 근대불교는 1895년 4월 23일 승려의 도성 출입금지가 해제되면서 시작됐다. 배불숭유(排佛崇儒) 정책으로 조선 500년 동안 불교는 쇠퇴의 길을 걸었다. 1902년 국가에서 원흥사를 설립하고, 불교를 국가 차원에서 관리하고 불교계 자율권을 일정 정도 인정했다.
1910년 통도사는 일제의 강점으로 새로운 변화를 겪게 된다. 1911년 일제는 불교계 포섭과 강제를 목적으로 사찰령을 발표한다. 주지 권한을 강조하고 사찰을 30본산으로 나눠 확정했다. 사찰령에 의해 1911년 11월 7일 통도사 주지로 김구하 스님이 인가됐다. 통도사 수반지는 내원사, 석남사, 표충사, 옥천사, 관룡사, 운문사, 용화사 등 8개, 산내 말사는 극락암을 비롯해 12개, 방등지 말사는 75개였을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1910년 6월 석탄일에는 500여명이 모일 정도로 규모가 커졌고, 명실상부한 국지대찰의 모습으로 변모했다. 통도사는 일제강점기 가장 많은 재적 승려가 소속해 있었고, 가장 많은 사찰 재산을 보유하고 있었던 곳이다.-이영백, 앞의 논문, 27쪽. 1920년에 양산시 하북면에 51만8천100평을, 울주군 삼남면에 29만2천600평을 소유하고 있었다.
통도사 불교전문강원
도성 출입금지 시기 통도사에 성해(聖海) 스님(1854~1927)이 있었다. 승통(僧統) 소임을 맡을 때 1900년 조선 선종을 중흥조인 경허(鏡虛) 스님이, 1901년 만공(滿空) 스님이 오셨다. 1905년 내원암 선원이 문을 열고 한암 스님이 조실로 5년간 계셨다. 이 시기부터 통도사는 한국 불교의 중심지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성해 스님은 1906년 황화각-현재 불교승가대학이 있다-에 ‘불교전문강원’을 설립해 10여년간 후학을 양성했다. 제자인 극락암 경봉 스님이 1912년 입학해 1914년 졸업했다. 그 후 스님은 1932년 불교전문강원장을 역임하며 통도사 강맥을 이어갔다.
1938년의 통도사 불교전문강원 학칙에 따르면 강원은 경(經)ㆍ율(律)ㆍ론(論) 삼장을 전문교육하는 기관으로 포교전도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초등 2년, 중등 3년, 고등 2년 과정으로 운영했다. 아마 1919년 전후에도 이와 유사했을 것으로 보인다. 1917년 통도사 본말사 전문강원 학생은 58명이었다.<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