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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대식 양산시 문화관광해설사 |
ⓒ 양산시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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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레마’라는 말을 우리는 많이 쓴다. 사전에 의하면 ‘선택해야 할 길은 두 가지 중 하나로 정해져 있는데, 그 어느 쪽을 선택해도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가 나오게 되는 곤란한 상황’을 말한다. ‘안보 딜레마’라는 말도 있다.
역시 사전에 의하면 ‘한 국가가 안보를 위해 군사력을 증강하면 주변국이 위협을 느끼고 군사력을 증가하거나 도발하는 기회가 되어 거꾸로 안보에 해가 되는 상황’을 가리키는 말이다. 걱정만 많고 아는 것은 없지만 주제넘게도 북핵문제에 대한 작금의 상황에 대한 개인적인 견해를 피력해보고자 한다.
북한은 그들에게 적대적인 한미동맹의 압도적인 군사력에 위협을 느껴서 자신의 안보를 위해 핵을 개발했다고 주장한다. 체제보장만 된다면 왜 어렵게 핵을 가지고 있겠느냐고도 했다. 북핵에 위협을 느낀 한미는 다시 군사력을 증강시키고 공동 군사훈련으로 그들을 압박한다.
그들의 안보를 위한 핵이 우리에게는 위협이 되고, 우리의 안보를 위한 군사훈련이 그들에게는 위협이 되는 것이다. 일본도 이를 빌미로 헌법 개정을 통해 정식 군대를 보유하는 소위 ‘보통국가’로의 움직임을 가속화하고 있다. 전형적인 ‘안보 딜레마’의 모습이다.
안보는 상대적인 것이다. 상대방의 위협이 존재할 때 그 위협을 제거하거나 거기에 대응하는 힘을 보유해야 나의 안보가 확보된다. 나의 안보를 확보하려는 방어적 노력이 상대에게는 위협으로 받아들여지고, 상대 또한 안보를 강화하려는 방어적 행위가 다시 나에게 위협이 된다. 이렇게 안보 딜레마는 서로에게 불필요한 무한경쟁을 유발시켜 국민생활에 여러 가지 어려움을 주고 국가 경쟁력을 약화시킨다.
우리는 한반도의 독특한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주변의 국제정세가 크게 요동치는 전환기마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 피해자가 된 역사적 경험을 가지고 있다. 가까이 20세기 중반, 냉전의 시작이라는 변동기에 한반도에서는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19세기, 서세동점의 전환기에는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국들의 각축이 청일ㆍ러일전쟁으로 비화되면서 동아시아의 패권은 일본이 차지하고 한반도는 결국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17세기 전반, 중화질서의 패권이 한족에서 만주족으로 교체되는 명청 교체기에 한반도에서는 정묘ㆍ병자 두 차례의 호란이 일어났다. 조금 더 전인 16세기 말, 명청 교체의 원인의 하나가 된 임진왜란이라는 국제전이 한반도에서 일어났다.
전환기적 상황 때마다의 이러한 역사적 경험들은 한반도가 주변 정세의 변화에 얼마나 민감하고 또한 취약한지를 알려준다. 그런데 바로 지금이 또 한 번의 전환기가 되지 않을까 우려를 금할 수 없다. 동아시아에서의 미ㆍ중의 패권 다툼과 일본의 군사대국화, 북한의 핵 보유 등이 아우러져 큰 변동을 촉발시켜 한반도가 또 한 번 거대한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어 가버리는 것이 아닐까. 이것이 심히 걱정되는 것이다. 그저 기우이기만을 바랄 뿐이다.
10대 때 경험했던 어떤 상황. 으슥한 뒷골목에서 ‘야, 너 이리와 봐. 호주머니에 있는 것 다 꺼내놔 봐…’ 그때는 압도적인 힘 앞에서 무력하게 당했는데, 지금 우리가 말하는 상대는 너 죽고 나 죽자는 최후의 무기를 손에 들고 버티고 있다.
어르고 달래어 어렵게 협상테이블까지 데리고 나왔다. 물론 우리도 여러 번 속았고, 그들은 그들대로 이른바 ‘시리아모델’을 거론하며 불신감을 감추지 않고 있다. 그런데 ‘야, 너 가진 것 다 내놔 봐’라는 식이면 어떻게 될까. 무릇 협상에는 상대가 있는 법이다.
하나를 받으려면 다른 하나를, 큰 것을 받으려면 다른 큰 것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 이번만은 실질적이고 지속적인 평화가 한반도에 정착되도록 당근과 채찍을 기술적으로 구사하면서 잘 이끌어 가면 좋겠다. ‘안보 딜레마’는 모두에게 힘든 것이다. 내게도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