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진곰파에서 만난 아이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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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배 알피니스트 (사)영남등산문화센터 이사장 체육훈장 기린장 수상 세계5대륙 최고봉 등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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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를 점점 높여가며 계속 올라갔다. 안개 속이지만 산록에는 무릎 아래 키 작은 관목들만 띄엄띄엄 있을 뿐, 에델바이스를 비롯한 붉은 꽃, 노란색 꽃, 파란 색 꽃 등 각양각색 꽃들이 만개해 바람결에 흔들리고 있었다. 점점 길은 높아지고 계곡은 깊숙해졌다. 시간이 허용하는 한 계속해서 올라가 보기로 했다. 이제 맞은 편 강진리 슬라이드 샌드[沙面]가 안개 속에서 거대한 빙하처럼 보였지만 짙은 안개로 인해 다른 풍경은 보이지 않았다.
오후 4시경 갑자기 빗방울이 후드득거리기 시작했다. 4천500m 고지 쯤에서 하산하기로 뜻을 모았다. 온통 운무가 뒤덮여 더 이상 설산 모습을 볼 수가 없다. 올라갈 때는 처음 올라가는 길이라 긴장도 하고 온 천지가 안개가 덮여 길을 밝히며 산행을 하기에 바빴지만, 내려올 때는 길 주위 산록에 핀 야생화가 눈에 감겨 들어왔다. 안개에 젖어 촉촉한 꽃들이 은은하게 마음을 적셔줬다. 올라온 곳을 내려가는 길이니 걷기가 편하고 훨씬 빠른 걸음으로 내려올 수 있었다.
해질 무렵, 한 줄기 햇살이 저 멀리 체르고리(TsergoRi, 4천984m) 서쪽 산록을 비추더니 하늘에 선명한 무지개가 나타났다. 변화무쌍한 히말라야 날씨가 빚어내는 신비로움이다. 그냥 무지개가 아니라 쌍무지개였다. 안개가 몰려와 휘감고 지나가더니 하루를 마감하는 저녁 쌍무지개가 하늘에 드리워져 있으니 천지 조화(造化)를 무엇으로 말할 수 있을까? 일행들 모두 밖으로 나와 자연이 베푸는 풍경에 환호하며 도취됐다.
사실 자연은 어느 순간도 멈추지 않는다. 천지 만물은 음양으로 구성돼 있고 그 운행은 오행으로 변화한다. 그 속에 모든 생명은 생성-성장-소멸하는 과정을 겪는다. 사계절 변화가 그렇고, 밤낮 교차가 그렇고, 물이 흐르고 기화하고 하강하면서 천하 모든 생명을 살리는 것이 그렇다. 우리 인간 목숨 또한 천지자연 조화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다.
이른 아침 해가 뜨기 전 일어나 밖에 나와 보니 하늘이 파랗게 열려 있다. 오락가락하는 구름이 걸려 있기는 하지만 원근의 설산(雪山)이 진면목을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그것도 해가 뜨기 전 잠시였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열심히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히말라야 트레킹 5일째 되는 날이다. 강진곰파를 출발해 랑탕빌리지~코다타벨라를 경유, 숙소인 림체까지 내려가는 길이다. 3일 전 고도를 높여가며 ‘이틀’ 동안 걸어올라 왔던 길을 오늘 ‘하루’에 되짚어 내려가는 여정이다. 3천800m 고지에서 2천m까지 고도를 낮춰가는 셈이다.
3일 전 안개 속에서 숨차게 올라오던 길을 오늘은 눈부신 햇살을 받으며 산길을 타고 내려갔다. 이 구간은 야생화 천국, 자연이 만든 천국의 화원이다. 3일 전 물기에 젖어 있던 초원의 들꽃이 오늘은 밝은 햇살을 받아 환하게 빛나고 한들한들 바람결에 흔들리고 있다. 시야가 환하게 열린 초원에는 고요한 평화가 흐르고 있다.
타르초 색깔이 위에서부터 파란색, 흰색, 그리고 붉은 색, 초록색, 노란색이 아닌가. 하늘과 구름 아래 불타는 꽃들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대지를 그 오색 깃발로 형상화한 것이다. 지상 모든 생명(生命)이 신(神)의 가호를 간구하는 타르초(Tarcho). 그렇다, 히말라야 자연이 곧 그들의 신앙이 된 것이다. 그렇게 들꽃에 취해 ‘비스타리 비스타리’(느리게 느리게)를 부르며 걸었다. 문명 도시에서 늘 조급했던 발걸음이 히말라야에서 유유한 몸짓으로 느림의 미학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그러므로 인간의 착한 본성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참된 삶을 살아가게 하는 근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착한 본성을 일상 행동에서 환하게 드러낼 수 있도록 마음을 닦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 가야할 길이다. 그래서 도(道)라고 한다. 거대한 설봉이 화사하게 밝은 순백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순간, 성현의 아름다운 인격처럼 다가오는 기쁨을 누리게 된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가? 저 산이 거기서 그것을 넌지시 암시하고 있는 듯했다.
랑탕마을을 지나는 길목에는 짐을 잔뜩 실은 덩키 행렬이 이어가고, 합판이나 양철판을 묶어서 이마에 띠를 매달아 지고 가는 현지인들 모습도 눈에 띈다. 히말라야 사람들은 어디를 가나 무거운 짐을 지고 다닌다. 이곳 사람들은 모든 등짐을 이마 띠에다 연결해 메고 간다. 우리와 동행하는 네팔 친구(포터)들 역시 생활 속에서 몸으로 익힌 직업적인 짐꾼이다. 현지 말로 ‘꿀리’라고 한다. 당나귀와 말 잡종인 덩키나 야크를 이용하는 것은 여유가 있는 사람이고, 일반 사람들은 늘 이마의 띠에 무거운 물건을 메고 다닌다.
어디 이들만 그러한가. 우리도 인생이란 짐을 지고 한 평생 길을 가지 않는가. 사람 일생이란 누구나 유형ㆍ무형의 크고 작은 짐들을 지고 가는 여정이다. 하나의 짐을 벗으면, 또 다른 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하루 짐이 있고 다른 날에도 또 다른 짐이 기다리고 있다. 나에게 짐이 있듯이 너에게도 지고 가야할 짐이 있다. 어느 하루도 짐이 없는 날이 없다. 그것이 인간의 사회적인 책임일 수도 있고 인간 도리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 짐이 언뜻 생각하면 ‘고통’을 안겨주기도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짐이 있음으로 해 우리는 삶의 보람을 느낀다. 자신에게 삶의 의미를 채워주는 기쁨이다.
인생에서 짐을 완전히 벗는 순간은 결국 죽음의 문 앞에서다. 죽으면 모든 짐을 벗어놓는다. 범박한 말로 하면 우리 인생은 짐이 있음으로 사는 보람이 이뤄지고 행복의 참맛을 알게 된다.
>>랑탕 히말 이야기가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