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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네팔ㆍ히말라야 배낭여행⑩] 마르파에서 트래킹에 종지부를..
기획/특집

[네팔ㆍ히말라야 배낭여행⑩] 마르파에서 트래킹에 종지부를 찍다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17/03/28 08:59 수정 2017.03.28 08:59















↑↑ ‘순박한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라는 뜻을 가진 마르파는 유럽 시골마을처럼 호젓하고 깨끗한 풍경을 자랑한다.
ⓒ 양산시민신문




한치 앞도 모를 히말라야 날씨














 
↑↑ 이상배
알피니스트
(사)영남등산문화센터 이사장
체육훈장 기린장 수상
세계5대륙 최고봉 등정
ⓒ 양산시민신문 
로우피상에서 50분을 더 걸어 고개에 오르면 찻집이 있는 노로다라에 이른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틸리초피크(7천134m)도 무척 아름답다. 노로다라 아래로는 훔데공항이 보인다. 롯지와 식당이 많은 훔데에서 점심을 먹고 마낭으로 향하는데 길이 생각보다 멀었다. 오후가 되니 바람도 차고 더러 흙먼지도 날렸다. 히말라야에서 한치 앞을 예단할 수 없는 것이 날씨가 아닌가 싶다.

다행히 마낭까지 별 무리 없이 걸었다. 마낭은 해발 3천540m 산중마을이다. 차메처럼 마을 규모가 큰데, 인터넷카페, 빵집,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도 있다. 하지만 마낭이 트레커들에게 더 의미 있는 이유는 앞으로 전개될 고산 트레킹을 이곳에서 충분히 점검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도 가지고 간 측정기로 산소포화도(spo2)와 맥박을 일일이 측정했다. 모두 정상 수치였다. 



히말라야는 깨달음의 땅이다. 깨달음은 개인이 얻을 수 있는 가장 훌륭한 교훈 중 하나다. 용기와 인내의 가치도 깨달음을 통해 얻을 수 있다. 고소(高所)는 높은 곳을 뜻하지만, 으레 고산증을 느낄 정도 높이라면 3천500m 전후를 일컫는다. 마낭은 해발 3천540m로 고산증이 나타나는 고소로 볼 수 있다. 또 초롱페디(4천450m)까지 18㎞를 계속 가풀막지게 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마낭은 히말라야 라운드 트레킹에서 가장 중요한 고소적응지로 손꼽힌다. 



모든 것을 멈췄다. 한마디로 큰 휴식이 필요했다. 일행에게 “천천히 먹고, 천천히 생각하고, 천천히 걸어야 합니다. 무조건 천천히, 아시겠지요?” 주의를 거듭 시켰다. 따뜻한 물을 많이 마시라는 주문도 덧붙였다. 


실제로 다음 숙박지인 야크카르카(4천30m)까지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었다. 야크카르카에 앞서 텐기마을을 지났다. 텐기마을은 마낭에서 30분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마을에서 잠시 뒤를 돌아다보니 마나슬루가 여전히 손짓하고 있었다. 



일행 중에 유일한 고등학생인 노재성 군은 새로운 산이 나올 때마다 호기심 가득한 눈길로 물었다. “저 산 이름이 뭐죠?” 그는 커서 뮤지컬배우가 되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히말라야를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아버지 권유로 히말라야를 찾았다. 중학생 때 몽블랑과 킬리만자로도 등정했다. 요즈음 보기드문 젊은 친구다. 히말라야도 벌써 두 번째 참가하는 걸 보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큰산을 바라보고 가는 그에게 큰 꿈이 이뤄지길 바라본다.















↑↑ 베시사하르에서 네니까지 총 231.8km 가운데 도보 구간인 참제~파르파 구간 131.2km를 걸은 끝에 마르파에서 달콤한 휴식을 취했다.
ⓒ 양산시민신문


찬바람 때문에 걸음이 자꾸 지체됐다

야크카르카는 생각보다 추웠다. 기온이 뚝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주변에는 텐트가 여럿 있었다. 롯지 대신 텐트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텐트트레커들이다. 4천m를 넘어서니 일행들도 조금씩 걱정이 앞서는 듯했다. 특히 나이가 많을수록 자신 한계를 우려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래도 야크카르카부터 초롱페디(4천450m)까지는 오르막이 비교적 완만했다. 하지만 올라갈수록 정면에서 불어오는 건조한 히말라야 찬바람 때문에 발걸음이 자꾸 더뎌졌다. 힘들지만 히말라야를 온몸으로 체험하는 아주 황홀한 순간이다. 


수목한계선과 급경사 비탈(Land slide) 구간을 지난 뒤 모퉁이를 돌아 올라서니 초롱페디가 시야에 들어왔다. 초롱페디는 얼마 전 큰 불이 나 숙소 사정이 좋지 않았다. 우리도 겨우 방을 구했다. 휴식을 취하는데 몇몇 참가자는 표정이 좋지 않았다. 고도가 4천450m에 이르니 호흡이 힘들어진 것이다. 가져간 고산증 예방약과 코넓힘 밴드를 미리 나눠주고 새벽 3시 출발과 동시에 복용하라고 알렸다. 다행히 초롱패스를 넘겠다는 의지가 다들 넘쳤다. 



아침은 ‘포리찌’를 먹었다. 보리죽 같은 음식이었다. 비탈은 얼음판이나 다름없었다. 캄캄한 새벽에 눈 덮힌 고갯길을 올라 가는데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지그재그로 2시간가량 오르자 ‘하이캠프’라는 롯지가 나타났다. 어둡고 복잡한 곳을 비집고 들어가야 했다.


하이캠프 롯지 안은 초롱패스를 넘겠다는 트레커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우리도 따끈한 차를 주문했다. 그 사이에 먼동이 서서히 밝아왔다. 막상 롯지를 나서니 음산하고 추웠다. “비스타리”를 외치며 걸음을 뗐다. 비스타리는 네팔어로 ‘천천히’를 뜻한다. 어지간히 올랐다고 생각하고 고도시계를 쳐다보니 아직 해발 5천100m를 가리키고 있다. 300m를 더 올라야 한다. 새벽엔 찬 공기가 힘들게 하더니 이제는 뜨거운 기온 때문에 얼굴 들기가 힘들다. 하얀 눈 사면에 주변 햇빛이 반사돼 더 뜨거웠다. 모두 침묵 속에 무거운 발걸음을 하나씩 옮겼다. 초롱패스는 그렇게 ‘천천히’ 다가왔다.


초롱패스(5천416m)에 올랐을 때에는 오후 1시가 훌쩍 지났다. 초롱패스 입간판이 눈에 뒤덮여 끝부분만 겨우 보였다. 사람들 소원을 담은 타르초 깃발이 넝쿨처럼 나부꼈다. 발아래 안나푸르나 산군이 펼쳐졌다. 세상이 두 가지 색 뿐이다. 하얀 눈과 푸른 하늘.


초롱패스에서 기념촬영을 마치고 묵티나트(3천700m)로 내려가는데 눈 때문에 길이 위험했다. 아니나 다를까 일행 중 기원섭 씨가 발목을 다쳤다. 늦은 오후가 되니 바람이 강해지고 눈발도 날렸다. 마일라가 부축을 하고 내려가는데 많이 힘들어 했다. 묵티나트에 도착하니 비가 내리고 어두워졌다. 저녁 내내 퍼붓던 비는 새벽에 폭설로 둔갑했다. 이것 또한 히말라야에서만 볼 수 있는 진풍경이다. 


히말리야 산중마을인 묵티나트는 불교와 힌두교 성지로 잘 알려져 있다. 묵티나트는 네팔어로 ‘영원히 타오르는 불’을 뜻한다. 늘 네팔이나 인도에서 찾아온 많은 신도들로 붐벼 숙소 구하기가 쉽지 않다. 우리도 한참을 헤매다 겨우 숙소를 마련했다. 숙소에서 잠시 쉰 뒤 곧바로 힌두사원 성지를 방문했다.
길에는 허접한 기념품과 생필품을 바닥에 깔아 놓고 여행자들을 호객하는 주민들이 더러 눈에 띄었다. “다시 인간의 삶 속으로 들어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붉은 벽돌 힌두사원은 그다지 웅장하지 않았다. 그러나 힌두사원의 내밀한 모습을 들여다보는 재미는 컸다. 사원 뒤로 돌아가니 108개의 수도꼭지가 있었다. 그 꼭지에서 쏟아져 나온 물을 사람들은 ‘성수’라며 귀하게 여겼다. 이곳에서 목욕을 하면 이승에서 지은 죄도 면할 수 있다고 한다. 묵티나트에서 좀솜까지는 비포장도로가 개설돼 있다. 아마 성지 순례객을 위한 배려인 듯했다. 



그러나 주변 경관이 좋아 트레커들 역시 이 구간을 주로 걷는다. 우리는 좀솜을 지나 마르파까지 트레킹했다. 26.7㎞ 거리였다. 앞서 카그베니(2천800m)에 잠시 들러 점심으로 라면을 먹었다. 오랜만에 라면 맛을 보니 국물까지 다 마실 정도로 좋았다. 허한 속이 꽉 찬 느낌이었다. 카그베니는 ‘은둔의 땅’이라는 무스탕으로 가는 관문으로 유명하다.

한계를 극복하고 만족을 느끼다

카그베니에서 좀솜(2천710m)까지도 길은 쉽지 않았다. 칼리간다키 강바닥을 타고 걸었는데 강바람이 생각보다 훨씬 더 거셌다. 바람이 사정없이 얼굴을 때렸다. 강 왼쪽으로 릴기리 봉과 틸리초피크 봉이 따라왔다. 경이롭고 장엄했다. 대자연 일부로 이들 산과 함께 걷는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빛과 어둠 사이 긴장에 우주의 힘이 있으며 설산(雪山)은 바다나 하늘 이상으로 자신의 참 존재를 밝혀주는 거울 역할을 한다고 ‘신(神)의 산으로 떠난 여행’에서 피터 매티슨(Peter Matthiessen)은 얘기했다. 


사과의 고장 좀솜에서는 포카라로 가는 경비행기를 이용할 수 있다. 경비행기를 타면 포카라까지 20여분이면 충분하다. 그러나 우리는 좀솜에서 머무르지 않고 마르파(2천670m)까지 이동했다. 좀솜보다 마르파에 있는 숙소가 훨씬 깨끗하기 때문이다. 마르파는 유럽의 시골마을처럼 호젓하고 깨끗했다. ‘순박한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란 뜻의 마르파란 이름이 어울리는 곳이다. 히말라야 서쪽에 위치한 다울라기리(8천167m)로 올라가는 등반가들도 이곳에서 휴식을 취한다. 이곳이 본격 등반을 앞둔 마지막 마을이기 때문이다. 우리도 이곳에서 여장을 풀고 전체 트레킹 일정 종지부를 찍었다. 베시사하르에서 베니까지 총 231.8㎞ 중 도보 구간인 131.2㎞(참제∼마르파)를 마무리한 것이다. 



몸은 힘들었지만 다들 자신 한계를 극복한데 대해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마르파 산속마을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고 이튿날 오전 10시 마을버스를 탔다. 마르파에서 베니까지는 67㎞ 구간이다. 포장도로였지만 자동차는 곡예를 하듯 위험천만하게 달렸다. 도중에 잠시 노천온천으로 유명한 타토파니에 들렀다.



이곳에서 현지식으로 배고픔을 해결했다. 베니에서 현지 주민들과 뒤섞여 포카라행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버스는 1994년 실라짓차를 구입하기 위해 처음 들렀던 바글룽를 거쳐 나야풀을 지나 4시간 만에 포카라에 닿았다. 산에서 도시로 온 것이다. 휴양도시로 잘 알려진 포카라는 카트만두와 달리 정말 아름다웠다. 사시사철 따뜻한 기온도 좋았다. 힌두교 시바신 전설이 담긴 폐와 호수는 언제나 안나푸르나 절경을 비추고 있었다. 주변 울창한 숲도 변함이 없었다. 



밤이 되니 호숫가에서 음악소리가 들렸다. 카페가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안나푸르나는 다른 지역에 비해 고산병으로 고생할 우려가 적다. 트레커를 위한 숙박시설도 잘 정비돼 있다. 라운드 트레킹 외에도 아주 짧은 일정의 미니 트레킹, 1∼2주 종주 트레킹도 여기서 즐길 수 있다.

>>다음은 랑탕히말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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