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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는 하늘을 나는 새라고 모두 넘을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만큼 높다. 생명체 중에서는 인도기러기가 유일하다고 한다. 커다란 날개로 무리를 지어 히말라야 정상을 넘어가는 장면이 종종 다큐프로그램으로 소개돼 큰 감동을 주기도 했다. 그곳을 인간은 ‘의지’로 오른다. 그래서 산은 정복 대상이 아니라 도전과 극복의 대상이라고 고산등반가들은 말한다.
세계 최고봉에서 트레킹피크까지 장엄하고 아름다운 설산들이 즐비한 곳이 히말라야다. 나는 장엄한 설산 봉우리를 수 십 년간 오르면서 등정의 희열도 느꼈지만 ‘나는 누구인가?(Who am I?)’라는 물음에 잃어버린 자신을 찾고 많은 깨우침을 얻었다. 그래서 히말라야는 빛이 바래있던 내 인생에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진주처럼 빛나는 보석이었고, 신비할 정도로 특효약이 됐다. 지금도 바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영혼이 맑아지고 몸도 마음도 가벼워지는 히말라야 산길을 순례하듯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끼며 야크처럼 우직하게 느리지만 당당하게 걸어보자.
신들의 고향, 히말라야. 보통 사람들은 아주 특별한 훈련을 거친 전문산악인이 아니면 범접하기조차 힘든 곳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최근 네팔 정부가 배낭여행 코스를 적극적으로 개발하면서 일반인조차도 히말라야 신비를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길이 많이 열렸다. 지리산이나 설악산을 무난히 갔다 올 정도라면 히말라야 도보여행도 무리가 아니다. 대표적인 여행코스로는 히말라야 3대 트레킹 루트라 부르는 쿰부히말라야 에베레스트 클래식트레킹과 안나푸르나 성역트레킹 그리고 중앙 네팔 랑탕 파노라마 트레킹코스가 있다. 이 루트들이 전 세계 트레킹족이나 백패킹족들에게 각광을 받고 있다.
쿰부히말 에베레스트지역은 베이스캠프+칼라파타르 트레킹 코스, 고쿄피크+렌죠패스 트레킹 코스가 가장 인기 있다. 안나푸르나지역은 ‘로얄트레킹’이라 부르는 푼힐전망대 코스와 안나푸르나 남면 베이스캠프(4천130m) 트레킹 그리고 안나푸르나 1∼4봉과 강가푸르나, 틸리초피크 호수와 장엄한 설산을 조망할 수 있고 5천416m의 초롱패스를 넘어가는 라운드 트레킹코스도 최근 가장 주목받고 있는 코스다.
그리고 랑탕지역은 짧게는 샤부루베시에서 강진곰파까지 갔다가 헬기로 카트만두까지 회귀하는 일주일짜리 코스가 있는가 하면 코사인쿤도, 헬렘부, 순다리잘을 거쳐 카트만두로 걸어서 넘어가는 보름가량의 트레킹 코스도 최근 인기가 높다. 그 외에도 마나슬루 라운드 트레킹 코스와 로왈링 트레킹 코스, 무수탕 트레킹 코스도 특별한 여행을 하기 위해 도보여행을 즐기는 배낭족들이 종종 찾는 곳이다.
이보다 더 다이내믹한 모험을 원한다면 쿰부지역을 관통하며 히말라야 3대 고개로 일컫는 태시랍차(5천755m), 민보라(5천845m), 암푸랍차(5천845m)를 통과하는 트레킹 코스를 추천한다. 이곳에는 숙박시설이 거의 없어 대부분 텐트에 의존해야 하고 동계장비도 갖춰야 한다. 하지만 대자연을 제대로 품에 안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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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그레이트 히말라야 트레일(GHT)이라고 1년 넘게 대산맥을 넘어가는 코스도 네팔 관광성에서 개발해 놓았다. 네팔어로 ‘-차’, 혹은 ‘-라’라는 접미사는 ‘고갯마루’를 뜻한다. 이밖에도 칸첸중가 트레킹 코스, 무스탕 트레킹 코스, 돌파 트레킹 코스, 라라호 트레킹 코스 등이 있다.
이들 코스는 접근하는데 교통이 너무 불편해 전문 여행자들도 낯설어 하는 곳이다. 네팔은 혼자 갈 수 있지만 히말라야를 오르거나 트레킹하는 것은 결코 혼자 힘으로 할 수 없다. 늘 배낭여행자의 짐을 대신 들어주는 ‘꿀리’ 또는 ‘포터’라는 짐꾼의 도움을 받게 된다. 사실 히말라야 도보여행자는 고소증 때문에 그냥 걷기도 힘들다. 그러나 이들 꿀리는 무거운 배낭과 여행자의 짐을 다 들고 좁은 계곡과 가파른 산기슭을 종횡무진하면서도 늘 웃는 얼굴을 보인다. 실제로 짜증 한 번 내는 경우를 보지 못했다. 오히려 “나마스테”라고 먼저 인사를 건넨다. 생각하는 사람은 걷고, 걷는 사람은 겸허해진다는 말은 틀리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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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먼드 힐러리(Edmund Hillary) 이야기
에드먼드 힐러리(Edmund Hillary)는 뉴질랜드 태생 청년으로 33세 나이에 네팔 셰르파족(族) 가이드 텐징 노르게이(Norgay, 당시 38세)와 함께 나중에 ‘힐러리 스텝’으로 이름 붙여진 12m의 험난한 수직 빙벽을 통과해 인류 최초로 에베레스트(Everest, 8천848m) 정상에 올랐다. 지금으로부터 63년 전인 1953년 5월 29일 일이다. 에베레스트가 세계 최고봉으로 밝혀진 지 100년, 사람들이 등정에 도전한 지 32년 만에 이뤄낸 쾌거였다. 그로부터 나흘 뒤인 6월 2일 엘리자베스(Elizabeth) 2세 영국 여왕 대관식에서 그의 에베레스트 등정 성공이 정식 공표되자 전 세계는 기쁨과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 일로 여왕은 힐러리에게 작위를 수여했고, 그는 힐러리 경(卿)으로 불리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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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원래 양봉업자였지만 뉴질랜드 남알프스에서 등반 기술을 습득하고 로우(J. Lowe)에게 빙벽등반 기술을 배우며 등산 활동을 시작했다. 1951년 로우와 함께 히말라야 무쿠트 파르바트(Mukut Parbat, 7천243m) 원정대를 조직했는데, 이는 뉴질랜드 최초 히말라야 원정대였다. 그는 이 원정에서 로우와 함께 정상에 오른 후 귀환 도중 영국 에베레스트 정찰대 대장인 쉽튼(E. Shipton)의 요청으로 정찰대에 합류한다. 이 정찰에서 그는 쉽튼과 말로리가 등반 불가능이라고 판정을 내렸던 웨스턴 쿰(Western Cwm) 돌파에 확신을 얻는다.
정찰을 마치고 돌아와 이듬해 쉽튼과 함께 초오유(Cho Oyu, 8천201m) 원정에 참가했지만 실패로 끝난다. 1953년 에베레스트 원정 대장으로 지명된 쉽튼은 그와 로우를 대원으로 선발한다. 그러나 대장이 쉽튼에서 헌트(J. Hunt)로 바뀌자 힐러리는 원정대에서 탈퇴하겠다는 뜻을 밝혔지만 쉽튼과 헌트의 설득으로 이를 받아들인다.
그는 원정대 셰르파 사다(Sirdar, 선임자)인 텐징 노르게이와 완벽한 팀워크를 맞춰 1953년 5월 29일 오전 11시 30분 세계 최고봉 정상에 올라섰다. 그는 1954년 바룬(Barun) 빙하를 탐험하고 바룬체(Baruntse, 7천220m)를 등정한다. 이후 1956년부터 1958년까지 남극 탐험에 참가해 남극점에 도달하고 1959년부터 1960년까지 마칼루(Makalu, 8천481m) 국제학술탐험대를 조직한다.
이 탐험대 목표는 우수한 장비를 사용해 효과적인 고도 순화와 전설 속 설인(雪人) 예티(Yeti)를 수색하는 것이었다. 탐험대는 아마다블람(Ama Dablam, 6천856m) 등정에 성공하고 무산소로 마칼루 등정도 시도했지만 등정 도중 힐러리는 뇌혈관 이상으로 후퇴하고 나머지 공격대원도 폐수종에 걸려 결국 철수하고 만다.
이 등반 이후 힐러리는 1967년 ‘히말라야 트러스트’라는 재단을 만들어, 문명 혜택을 받지 못한 채 어려움에 처해 있던 히말라야 에베레스트 산중 사람들을 위해 120여 차례나 네팔을 방문하며 학교와 병원 등을 지어 주는 사업을 추진했다. 죽기 전 그의 재산은 재혼한 부인과 함께 사는 오클랜드 바닷가가 내려다보이는 작은 2층집이 전부였지만, 매년 25만 달러 이상 기부금을 모아 셰르파족을 돕는 데 썼다. 첫 부인과 딸은 1975년 히말라야에서 봉사활동을 하던 중 비행기 추락사고로 숨졌다. 생존 인물로서는 유일하게 뉴질랜드 지폐(5달러)에 얼굴이 그려진 그는 1982년에는 자신이 사인한 5달러 지폐 1천장을 판매해 모은 53만 달러(약 5억 원)를 네팔에 기부하기도 했다.
장남인 피터 힐러리(Peter Hillary)도 뒤를 이어 산악활동을 시작해 1982년 로체(8천511m)에 도전했지만 실패한다. 하지만 1990년 5월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랐으며, 힐러리와 함께 정상에 오른 텐징 노르게이 아들인 잠링 노르게이 또한 1996년 5월에 정상에 올라 2대에 걸쳐 부자가 정상에 오르는 기록을 세운다.
“뛰어난 사람만 인생을 잘 살 수 있는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동기다. 진정 무언가를 원한다면 온 맘을 다해라”
늘 이야기하던 자신의 철학을 삶의 끝자락에 닿을 때까지 몸소 보여줬다. 그가 1975년 펴낸 자서전 제목인 ‘모험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Nothing Venture, Nothing Win)’는 이러한 그의 삶을 잘 요약하고 있다.
그가 세상을 뜨며 남긴 마지막 바람은 “내가 좋아하는, 내 삶의 출발점인 고향 바다에 닿고 싶다”였다. 그리고 유골을 오클랜드 앞바다에 뿌려 달라고 부탁했다. 정작 영광을 안겨준 산에는 어떤 흔적도 남기고 싶지 않다고 했다. 2008년 1월 11일 뉴질랜드 자택에서 죽었을 때 네팔 아시안트레킹 툭텐 사장은 직접 뉴질랜드로 가서 장례를 치르고 왔다. 그의 집 거실에 놓여 있던 사진은 바로 각별한 두 사람의 우정과 사랑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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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배
알피니스트
(사)영남등산문화센터 이사장
체육훈장 기린장 수상
세계5대륙 최고봉 등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