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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유물전시관 자료제공
↑↑ 백년만의 귀환, 부부총 특별전시회 전시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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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와 가야를 품은 고분, 부부총
양산 북정동에 있는 부부총은 낙동강 지류인 양산천 유역에 형성된 넓은 평야지대를 향해 뻗어 내린 능선 정상부를 따라 대형봉토분(大形封土墳)이 나란히 우뚝 솟아 있다. 이러한 북정동 고분군의 입지 양상은 가야지역의 일반적인 수장급 고분군과 매우 유사하다. 창녕, 고령, 함안 등의 가야의 수장묘는 구릉의 정상부나 지형적으로 높은 곳에서 중심지를 조망하는 입지를 가지고 있다. 고분이 단순한 왕이나 귀족의 무덤이 아니라 일반 민들을 보호 감시하는 암묵적 통치의 기능도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즉 거대 규모의 고분을 능선의 정상부에 쌓음으로써 무덤은 실제보다 더 크고 웅장한 느낌을 지니게 된다.
한편, 양산은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 탈해 이사금 21년 “…가야 군사와 황산진 어구에서 싸워…”라고 기록될 만큼 신라 초기부터 군사적 요충지로 이용됐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지역은 지리적으로 가야와 매우 인접해 있으며, 지리적으로 가까운 만큼 양산지역의 신라 고분들은 구릉의 정상부나 경사면에 분포하는 등 가야문화적 요소를 닮고 있다. 그러나 조사된 유구와 유물은 신라문화에 가깝다. 이러한 고분문화의 이중적인 성격으로 인해 중요한 유적지로 평가되기도 한다.
파헤쳐진 한반도
↑↑ 부부총 발굴 당시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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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고대 한반도 남부 일부를 지배했다는 학설에 대한 학문적 뒷받침이 될 만한 증거를 찾고자 가야지역 고분 발굴에 주력했으며, 대부분 고분 조사는 발굴이라는 명목 하에 파헤쳐졌다. 그 과정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우리의 품을 떠나 반출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무작위로 파헤쳐진 고분에서는 임나일본부설을 확증할만한 유물이 발굴되지 않았고, 유물에 대한 약탈만이 있을 뿐이었다.
일제의 식민사관은 특히 식민통치의 문화적 성격을 과시하기 위한 일환으로 해마다 보고서를 간행하며, 식민통치의 문화적 면모를 과시하고자 했다. 그러나 순수한 학술연구가 아닌 정치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시작된 것이기 때문에 조사내용의 결과에 대한 정확한 보고가 거의 없고, 발굴조사와 관련된 활동내용과 일지, 보고서 정도에 그치고 있어 그 피해는 오늘날 우리 국민이 짊어져야 하는 부담으로 남게 됐다.
13일간 양산지역 최초로 고분 발굴
↑↑ 부부총 내부 실측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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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기록을 살펴보면 양산 부부총 발굴조사는 단 13일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석실 내의 유물을 꺼내는 데 집중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유물들은 1938년 3월 조선총독부에 의해 도쿄제실박물관(도쿄국립박물관 전신)으로 기증됐으며, 1958년 개최된 제4차 국교정상화회담에서는 문화재 반환문제가 공식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하면서 양산 부부총 출토품을 되돌려 받을 기회가 한 차례 있었으나, 일본국립박물관에 진열하겠다는 일본측의 요구를 받아들여 결국 반환이 보류됐다.
무덤 속 주인은 정말 부부일까?
무덤의 주인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견이 있다. 유물의 성격에 비춰 당시 양산 일대에서 중앙과 연계된 강력한 정치적 세력을 갖춘 인물의 묘로 추정하면서 당시 삽량 도독인 김서현 장군 부부의 묘라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김서현의 사위가 산성의 성주로 백제군과 대치 중 전사해 이곳에 묻혔다는 설도 있다.
누구의 무덤인지 명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단서는 없다. 다만 부장유물을 통해 무덤 주인의 신분은 어느 정도 가늠해볼 수 있는 것이다. 가령 허리띠꾸미개는 금제, 은제, 금동제로 나뉘는데 착용했던 사람의 지위를 반영한다. 금제는 왕족 이상이 착용할 수 있으며, 이들은 은제와 금제도 소유한다. 금동제와 은제는 그 아래의 지배층들이 쓴 것으로 판단된다.
부부총에서는 은제 허리띠꾸미개 2점이 출토됐는데 같은 시기 경주의 신라귀족 혹은 왕급 무덤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낮은 신분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주인공은 고대 신라의 중앙(경주)과 연계된 양산지방을 통솔하는 수장의 것이나 단순한 수장 이전에 거대한 정치적 세력을 가진 지방 군주임이 분명하다.
부부총의 구조
부부총은 봉토(지상 위로 흙을 쌓아올린 부분)의 크기가 지름 23m, 높이 3m인 원형의 봉토분이다. 봉토 둘레에는 비나 바람으로부터 무덤을 보호하는 호석(護石)과 주구(周構)를 만들었다. 부부총의 중심이 되는 돌방(石室)은 동서방향을 장축으로 해 길이와 너비, 높이가 각각 5.49m×2.7m×2.58m인 긴 직사각형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무덤의 출입구는 서쪽 방향으로 뚫었고, 나머지 동ㆍ남ㆍ북벽은 깬 돌을 정교하게 쌓아올렸다.서쪽의 입구에는 양옆에 돌을 쌓고 중앙 부분을 입구로 사용했는데, 발굴 당시에 입구는 돌로 막혀있었다.
시신이 놓이는 부분에는 높이 80㎝ 정도의 주검받침(屍床臺)를 만들었는데, 주검받침은 2차에 걸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처음에는 주인의 시신이 놓일 부분은 80㎝로 쌓고 반대편은 30㎝정도 낮게 조성했으나 후에 부인이 죽고 부인을 추가로 매장하는 과정에서 낮게 조성한 받침 부분을 주인이 놓인 부분과 동일한 높이까지 높여 나란하게 안치할 수 있게 조정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주검받침의 밑에 안치된 3구의 시신에 대해서는 일제강점기 당시 자세한 조사가 이뤄지지 못해 정확한 매장 경위를 파악하기 힘들다. 많은 학자의 추정대로 순장일 수도 있다.
부부총 특별전에서 눈여겨볼 유물은?
↑↑ 금동 말안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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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의 것으로 추측되는 유물은 자작나무로 만든 관모(冠帽)와 은제관식(銀製冠飾), 굵은고리귀걸이(太環耳飾), 목걸이(頸飾), 금제ㆍ은제ㆍ유리제 팔찌, 은제허리띠(銙帶)와 허리띠드리개(腰佩), 철제가위 등이 있다.
↑↑ 부인용 곡옥 목걸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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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인용 목걸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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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에 부부의 방에는 다량의 토기그릇과 마구(馬具) 등 다양한 물건들을 만들어 부장함으로써 내세에서도 사용하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