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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부부총 출토 유물 93년 만에 고향 땅 밟는다 ..
문화

부부총 출토 유물 93년 만에 고향 땅 밟는다

홍성현 기자 redcastle@ysnews.co.kr 입력 2013/09/16 09:08 수정 2013.09.16 09:08
내달 15일부터 특별전

곡옥 목걸이 등 68점

국보급 ‘금동제관’ 제외



↑↑ 금동관(金銅冠)
주인이 착장하고 있던 금동관으로 금동의 얇은 판으로 제작돼 대륜부와 입식부, 수식부를 따로 제작해 조립한 것이다. 입식부에는 정면과 측면에 3개의 3단 出자형 입식을 세웠고, 뒷면에는 곡선을 띄는 사슴뿔 모양의 입식을 세웠다. 입식에는 수많은 잎 모양 금동환을 달아 화려함을 더했다. 대륜부 아래는 길게 내려진 수하식(垂下式)은 태환이식의 것과 많이 닮아 있으며 수식(垂飾)을 포함한 길이는 무려 62.6㎝나 된다. 부부총에서 출토된 금동관은 재질적인 면에서 차이가 있으나, 경주 금관총에서 발굴된 금관과 형태가 매우 유사한 것으로, 이는 양산지역이 신라의 중앙인 경주와 많은 교류가 있었음을 시사해 주는 역사적 상황을 암시해 준다.
북정동 고분군에서 출토돼 일본으로 반출됐던 양산의 유물이 93년 만에 고향 땅으로 돌아온다.

양산유물전시관(관장 신용철)은 오는 10월 15일부터 내년 1월 12일까지 3개월 동안 ‘백년만의 귀환, 양산부부총 특별기획전’을 연다고 밝혔다.

이번 전시회는 1920년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강제로 발굴ㆍ조사돼 일본으로 반출된 뒤 도쿄국립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던 양산 부부총 유물이 고국으로 돌아와 전시되는 뜻깊은 기획전으로, 부부총 출토 대표 유물 68점과 관계자료 등이 공개된다.

주요 유물은 보물급으로 평가받는 곡옥 목걸이와 금동안교(말안장), 금제굵은귀걸이, 금동제 고깔형태의 관ㆍ관꾸미개, 통형그릇받침 등이다. 하지만 부부총 출토 유물 가운데 국보급으로 평가되는 금동제관은 운반으로 인한 훼손을 우려해 이번 전시에서 제외됐다.

↑↑ 목걸이(頸飾)
이 목걸이는 부인의 가슴 부근에서 발견된 것으로, 아래쪽 중앙에 굽은 옥을 두고 그 좌우에 각종 옥 11개를 균등하게 배열했다. 즉 중간에 있는 홍마노제의 굽은 옥을 중심으로 좌우로 대칭되게 수정제 옥, 순금제, 청색 유리제 등 다양한 재질의 옥을 조화롭게 매달아 한결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각 옥은 은으로 만든 끈으로 연결했고, 양 끝 부분은 둥글게 연결고리를 만들었다. 옥을 연결했던 끈은 대개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삭아 없어지는 것이 보통이나 이 목걸이는 천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완전한 형태로 확인됐으며 여전히 아름다운 빛깔을 내고 있다.
한편, 세계 5대박물관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이 우리나라 기초자치단체가 설립한 박물관과 협약을 체결해 진행하는 최초의 전시다. 관련 학계 등에서는 매우 이례적이며, 역사적인 전시로, 양산시민의 문화적 자긍심을 더욱 높일 수 있는 의미 있는 전시라 할 수 있다.

이번 특별전은 양산 부부총 출토 보물급 유물 대부분을 한자리에서 관람할 수 있는 최초의 전시다. 전시 전부터 이미 역사학계와 고고학계에서 올해 하반기 최대 이슈로 떠오르고 있으며, 관련 전문가들은 삼국시대 신라 고분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부부총은 1920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발굴돼 당시 출토 유물 120여건 전체가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에 기증됐으며, 1965년 한일유물반환협정에서도 도쿄국립박물관의 거부로 국내에 환수되지 못하고 도쿄국립박물관 동양관에 일부 전시돼 있다.

↑↑ 은제허리띠(銀製銙帶)
부부총에서는 모두 36매로 구성된 방형의 허리띠장식으로 조립된 은제허리띠가 출토됐다. 각 허리띠장식 밑에는 하트모양의 수하부(垂下部)가 달려 있으며, 그 밑으로는 요패(腰佩)가 연결돼 있다. 허리띠장식 후면에 가죽을 붙였던 흔적이 남아있다. 복식금제령에서 보면 신분상 등급에 따라 허리띠장식의 재료ㆍ색ㆍ수를 달리해 등급표시 상징으로 쓰였다.
양산유물전시관은 개관 전부터 유물 소장처인 일본 도쿄국립박물관과 특별전시를 위한 긴밀한 협의를 진행했으며, 지난 8월 일본 도쿄국립박물관과 부부총 유물대여 전시에 관한 협약을 체결하고 관련 자료를 교류하는 등 특별전시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신용철 양산유물전시관장은 “이번 부부총 특별전을 계기로 국내ㆍ외에 혼재하고 있는 양산 출토 유물에 대한 발굴과 연구를 지속적으로 추진해 유물환수를 위한 새로운 출발을 도모할 예정”이라며 “유구한 양산의 잃어버린 역사 복원에 양산유물전시관이 앞장서겠다”고 밝혔다.
↑↑ 금동제 말안장 꾸미개(金銅製鞍橋)
말안장꾸미개는 말을 타는 사람이 말에 올랐을 때 몸 균형을 유지하고 편하게 고정해 주는 역할을 하는 말갖춤의 하나다. 이 말안장꾸미개는 나무재질 전륜과 후륜을 먼저 만들어 전ㆍ후륜부 바깥에 금동판을 씌우고 안쪽에는 가죽이나 삼베 등을 씌운 목심금동제다. 표면은 금동판에 물고기 비늘처럼 보이는 문양이 장식돼 있으며 뒷면에는 가죽이 일부 확인됐다. 앞쪽 꾸미개는 약간 부푼 반원형이고, 양 끝에는 못 구멍이 뚫려있다. 뒤쪽의 꾸미개는 앞쪽 것과 유사하지만 사방수를 달았던 흔적이 장방형으로 각각 2개씩 뚫려 있다. 이와 같은 말안장꾸미개 부장은 무덤주인의 권력을 상징하는 최상의 물품이라고 할 수 있다.
↑↑ 바리그릇받침(鉢形器臺)
회색 도질제 바리형 그릇받침으로 바리부분은 반달모양으로 배심이 깊은 편이다. 그릇 부분과 다리 부분이 겹쳐지는 곳은 매우 넓으며, 그릇 표면 전체에는 원권문과 격자문이 교대로 시문돼 있다. 원권문은 상하로 나란히 그려져 있고 격자문은 빗살과 같은 도구로 먼저 세로방향으로 긋고 그 위에 가로로 그은 것이다. 그릇의 두께가 매우 두껍고, 대각 하단은 불완전한 소성으로 뒤틀려 있다. 바리그릇받침 형태는 굽다리접시와 비슷한데 점차 높이가 높아지면서 특정 물질이나 물건을 높이 올려놓기 위한 기능이 강조되는 방향으로 점차 변화한 것으로 생각된다. 즉 일반용기로서의 의미가 약화되고 의례용기로 부장되는 것이다.
↑↑ 금제굵은고리귀걸이(金製太鐶耳飾)
순금으로 제작된 굵은고리모양의 귀걸이다. 그 아래로 가는 고리를 연결했으며, 수하식(垂下飾)을 붙였다. 수하식은 다시 가는 고리를 연결하고 중심축에 상하 각각 연결고리를 만들어 10매와 7매의 작은 하트모양의 흔들리는 장식(步搖)을 2단으로 달았다. 끝 부분에는 중간크기의 하트모양 장식을 매달아 마감했는데, 얇은 금판을 두드려 튀어나온 듯한 점열문이 시문돼 있다. 이 부부총 출토 귀걸이는 금조총에서 출토된 태환이식과도 유사하며 뛰어난 신라의 금속공예 기술을 보여주는 유물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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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분군 부부총은 신라시대 조성된 순장무덤

부부총이 있는 사적 제93호 북정동 고분군(사진)은 성황산(330.6m) 서쪽 산등성 일대에 20여기의 고분군으로 형성돼 있다. 대형무덤은 산의 윗부분에 퍼져 있고, 소형무덤은 비탈진 곳이나 산 아래쪽에 자리 잡고 있다.

그 가운데 북정동 10호분은 두 개의 인골이 나란히 배치돼 있어 부부총으로 지칭한다. 북정동 고분군 가운데 가장 큰 봉분으로, 무덤 구조로 볼 때 6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부부총 내부 바닥에는 주인으로 보이는 남성과 여성을 나란히 눕혔고, 입구 쪽에는 인골 3구가 확인됐다. 무덤의 주인인 남성은 금동관을 쓴 상태로 은제허리띠와 허리띠장식, 금제귀걸이, 금제목걸이 등으로 몸을 치장했다. 좌우에는 큰칼이, 발차에는 금동신발이 놓여있다.

부인으로 추정되는 여성은 자작나무 관모를 쓰고, 은제허리띠와 허리띠장식, 금제귀걸이, 마노소옥 팔찌, 은제팔찌 등 장신구로 꾸며져 있다. 또한 손칼과 가위도 확인됐다. 이외에 안쪽 벽측에는 뚜껑굽다리접시, 긴목항아리, 그릇받침 등 다양한 토기류와 철제등자, 청동제말방울 등 마구류가 출토됐다.

이 고분은 당시 신라의 중심인 경주에서 조사된 고분과 밀접한 관련성을 보여준다. 묘제의 주인공은 삼국시대 신라 귀족이나 신라 왕조에 흡수된 지방의 호족 혹은 고관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때문에 북정동 고분군은 양산시가 가야 문화권이었다는 추측을 뒤집고, 신라시대 삽량주로 불리며 교통ㆍ물류의 중심지로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지역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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