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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6.25의 증언 - 상북면 출신 윤정식 예비역 중령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의 상처

홍성현 기자 redcastle@ysnews.co.kr 385호 입력 2011/06/21 10:34 수정 2011.06.21 10:29
통신장교로 6.25전쟁 참전… 포로로 잡혔다 극적 탈출



ⓒ 양산시민신문

윤정식 어르신은 1927년 3월 10일 양산군 상북면 상삼리에서 태어났다. 당시 집은 대농을 하는 등 양산 고을에서 제법 행세하는 집안이었다. 상북심상소학교(현 상북초등학교)와 양산농업전수학교를 졸업한 뒤 일제 말기 때 부산우편저금관리국에서 근무하다가 해방 이후 부산고등무선통신학교에 입학했다. 전문학교 재학 시절 해방된 조국은 남북으로 분열됐다. 극심한 좌우대립 속에서 국방을 강화하는 데 보탬이 되고자 육군사관학교 10기(통신사관 6기)로 입학해 시흥에 있는 육군보병학교에서 3개월 동안 군사훈련을 받았다.

첫 임무는 자살특공대


↑↑ ·양산군 상북면 상삼리 558번지 출생
·상북초등학교, 양산농업전수학교
·부산고등무선통신학교
·육군사관학교 10기
·1950. 8. 15 소위 임관
·1951. 1. 8 포로
·1951. 4. 8 덕천포로수용소 탈출
·1951. 9. 16 생환
·1963. 제9사단 통신참모 복무 중 예편
ⓒ 양산시민신문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를 기해 북한군이 전격적인 남침을 감행하면서 6.25전쟁이 발발했다. 순식간에 전선은 무너졌고,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이런 상황은 아직 훈련도 마치지 못한 생도들마저 무기를 들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당시 6개 특과병과는 통신ㆍ병기ㆍ병참ㆍ경리ㆍ공병ㆍ헌병으로 구성됐는데, 이들로 특공대를 조직했다. 임무는 TNT 30파운드를 안고 한강을 건너 서울에 잠입하는 적 탱크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당시 우리군은 탱크를 막을 무기가 없었다. 결국 적 앞에 폭탄을 들고 돌진하라는 자살특공대였던 셈이다.

“우리군 지휘관이 생도들을 모아놓고 건물에 숨어 있다가 탱크가 15m 이내로 접근하면 탱크 시야에 포착되지 않기 때문에 폭탄을 안고 달려가 탱크 밑에 놓고 세 바퀴를 굴러 바닥에 엎드린 뒤 입을 벌리고 있으면 괜찮을 거라고 하더군. 그런데 괜찮을 리가 있나? 그냥 죽으라는 소리로 받아들였지”

특공대 공격 순서는 헌병ㆍ공병이 1차, 통신ㆍ병기가 2차, 경리ㆍ병참이 3차 공격였다. 그날 밤 1차 공격을 나갔던 1차 특공대가 한강도하 중 적의 총격을 받고 전멸했다. 1차로 특공대가 실패하자 작전은 취소됐다. 젊은 생도들이 아까운 목숨을 잃었다. 사실 자살특공대 훈련을 받고 출동을 기다리던 중 아주 막막한 심정이었고 아까운 목숨을 제대로 써보지도 못한 채 죽겠구나 생각하니 허무하기 짝이 없었다. 작전이 취소되자 살았다는 안도감과 함께 이렇게 터무니없이 허무하게 밀리고만 있는 현실이 서글펐다.

생존한 통신생도들과 함께 부산 철도국 건물에서 통신교육을 받은 뒤 8월 15일 소위로 임관했다. 9월 7일 육군 보병 제7사단 제5연대 제1대대 제2842부대 통신대장직을 맡아 정식장교의 신분으로 전쟁터에 나가게 됐다. 첫 전투는 경상북도 영천과 포항 인근의 안강전투였다. 총탄에 쓰러지는 병사가 있는 전쟁터이지만 대인지뢰를 밟아 다리가 잘려나간 병사의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때로는 머리가 날아간 시체, 팔이 없는 시체, 허리가 잘려 나간 시체 등 차마 눈 뜨고 보기 어려운 형상의 시체가 여기저기 나뒹굴었다. 특히 안강전투는 한 번 후퇴했다가 다시 공격하는 곳이라 이전에 죽은 아군과 적군의 시체가 썩으면서 풍기는 송장 냄새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이토록 비참한 아수라 전투가 계속 됐다.

 
↑↑ 1950년 당시 윤정식 소위의 실종을 알리는 실종통지서와 군사우면 봉투
ⓒ 양산시민신문 


북진, 후퇴 그리고 포로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렸던 전세는 9월 15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인해 순식간에 역전됐다. 부대는 북진을 계속하여 별다른 큰 전투 없이 북한의 수도 평양을 관통하는 대동강에 다다랐다. 부대는 다시 평양 우측으로 진격, 개천까지 전진했다. 이때 중공군에 밀려 후퇴하는 제6사단을 만나 중공군이 개입했다는 소식을 처음 듣게 됐다. 우리 부대는 용문산에서 중공군과 대치하여 전투를 치렀다. 용문산전투가 얼마나 치열했으면 길은 시체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임무가 통신소통이었기 때문에 길 위의 시체를 밟고 다닐 수밖에 없을 정도였다. 포병부대에 연락하여 지원 포격을 요청했지만 포탄이 바닥났다는 회신을 받을 정도가 됐으니 얼마나 전투가 치열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용문산을 넘어 덕천을 거쳐 묘향산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후방의 연대지휘부가 중공군의 기습을 받았으며 뒤늦게야 덕천으로 후퇴하라는 통신명령을 하달받았다. 전쟁에서 제일 비참한 일은 적에게 밀려 도망가는 것이다. 사기는 떨어지고 따라서 행군도 맥이 풀렸다. 전열을 가다듬고 골짜기를 지나자 마을이 나타났다. 마을 한가운데 운동장이 있었는데 운동장에 들어서자마자 사방에서 적의 기관총이 불을 뿜기 시작하였다. 뒷산에서 쏟아지는 기관총소리, 여기저기서 아군이 지르는 비명, 지옥이 따로 없었다. 사방으로 흩어지는 아군에 섞여 여기를 벗어나야 했다. 나는 앞에 보이는 산으로 도망을 쳤다. 한참을 달린 후 주위를 살펴보니 아군 30여명이 있었다. 눈을 돌려 산 아래를 보니 중공군이 새까맣게 깔렸었다. 이윽고 중공군이 인근 야산을 수색하기 시작하였다. 낙엽으로 몸을 묻으며 숨었으나 일부 병사는 중공군의 포로로 잡혀 끌려가고 있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낙엽을 떨치고 밖으로 나왔다. 남은 사람은 6명이었다.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김 중사라는 사람과 윤 일병을 포함한 5명의 사병이었다.


목숨 건 포로수용소 탈출


11월 27일, 덕천 임하리 인근 야산 동굴에 숨었다. 일행은 날마다 우리군의 북진을 기다렸다. 그러나 포 소리가 점점 멀어져가는 이유가 중공군의 대량 개입에 의한 총공세로 국군 과 유엔군이 계속 남쪽으로 밀려가는 데 있었음을 알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해가 바뀌어 1951년을 맞게 됐다. 그리고 그 해 1월 8일 북한 자위대원들에게 우리의 은신처가 발각되고 말았다. 결국 북한 내무서에서 심문을 받은 뒤 포로수용소에 수감됐다. 포로수용소의 생활은 배고프고 힘든 나날이 이어졌다.

포로가 된 이후 신분을 숨겨야 했다. 장교 6명이 총살됐기 때문이다. 당시 우리군과 포로 명단이 교환됐던 신의주 포로수용소와 달리 덕천포로수용소는 그런 것이 없었다. 누가 잡혀 있는 지도 모르고, 죽여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등병에 글자도 모르는 까막눈이라고 속였다. 살아계신 아버지도 죽었다고 했다. 하지만 누군가 신분을 밀고했다. 내무서에 불려 내려가 신분 확인을 했다. 죽음의 위기에서 4월 8일 저녁 9시, 일행 5명과 함께 탈출을 감행했다. 저녁 9시는 학습을 마친 포로들이 한꺼번에 밖으로 쏟아져 나오는 시간이었다. 재빨리 수용소의 뒤로 돌아나간 나와 일행은 펜치로 철조망을 끊고 앞산을 향해 정신없이 내달렸다. 20여m를 달리자 뒤에서 총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나는 수용소 앞 산꼭대기를 향해 어둠 속을 전속력으로 달리고 또 달렸다. 잠시 후 수용소 탈출에 동참한 5명 중 한 명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총을 맞았는지 끝내 오지 않았다.


생사를 넘나드는 도피생활


끝없는 도피 행각이 이어졌다. 무조건 남쪽으로 내려갔다. 때로는 중공군이 와글와글한 마을에 들어갔다가 고스란히 죽을 뻔한 고비를 맞기도 했다. 산속에서 헤매다 적을 만나면 도망을 치는 것이 상책이었다. 적에게 잡히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각자 흩어져 자기 요령껏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동료 병사 3명을 잃었다. 또 한 번은 칠흑 같은 어두운 밤에 대동강 하류를 건너다 나머지 동료 병사마저 급류에 휩쓸려 버렸다. 결국 혼자 남하하게 됐다. 혼자서 움직이는 것은 지금까지보다 더욱 힘이 들었다. 갈수록 중공군의 숫자가 늘어나 움직이기가 어려웠다. 도라지를 캐 먹거나 외딴 민가에서 음식을 훔쳐 먹으며 버텼다. 

“한 번은 어느 바위 아래 웅크려 있다가 그만 잠이 들고 말았어. 그 순간 꿈속에서 총을 든 아버지가 나타나 ‘도망쳐’라고 하는 거야. 깜짝 놀라 잠에서 깼더니 중공군이 수색작업을 벌이고 있더군. 도망칠 곳이라고는 30m나 되는 절벽밖에 없었지. 어쩔 수 없이 뛰어내렸는데, 왠지 하늘을 나는 느낌이 들더군. 거짓말처럼 많이 다치지도 않았어. 그때부터 정신의 힘이 위대하다는 것을 알게 됐지”

너무 배가 고파 중공군 식량인 미숫가루를 훔치러 갔던 적도 있다. 군량고를 지키고 있던 병사를 피해 조심스럽게 접근하던 중 그만 전화선에 발이 걸리면서 발각돼 간신히 도망친 적도 있다.


여섯 달 만에 기적의 생환


여러 고비를 넘겨 도착한 곳은 강원도 평강 위의 이천이었고, 전선이 철원지역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또 철원에 미군이 주둔하고 있다는 소식도 전해 들었다. 1월 8일 포로가 돼 수용된 덕천포로수용소를 4월 8일 극적으로 탈출한 이래 지옥 문 앞을 수없이 지나치고 피하며 남쪽으로만 도피해온 지 4개월여. 어느덧 하늘을 뒤흔드는 비행기 소리가 들려왔다. 아군의 정찰기였다. 그때 어디서 전차가 움직이는 소리도 들렸다.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전차가 있음이 분명했다. 전차가 있는 쪽을 향해 움직였다. 그렇게 계속 움직이고 있는데 저쪽에서 갑자기 전차가 나타났다. 전차와 나의 거리가 70m 정도였다. 전차를 보는 순간 나는 두 손을 번쩍 들고 전차에 가까이 다가갔다. 전차는 멈칫멈칫 하다가 계속 전진하여 내 앞에 와서 멈춰 섰다. 잠시 후 전차 안에서 3명의 군인이 나왔다. 미군이었다. 그들은 나에게 오더니 나의 몸수색을 하였다. 당시 내 모습은 수염과 머리는 깎지 못해 덥수룩하게 길었고, 신발은 천을 칭칭 감아서 볼썽사납게 커다랗고, 옷은 헤지고 갈기갈기 찢어져 땟국이 질질해서 엎드리면 짐승과 같고, 서면 사람 비슷한 형상이었다.

미군은 “Who are you?”라고 물었다. “I am a Korean soldier”라고 답했다. 그들은 곧장 지프차를 태우고 미 제3사단부대로 데려갔다. 9월 16일이었다. 무려 여섯 달 만에 탈출에 성공한 날이었던 것이다. 그 이후 CIC(특무대) 조사를 받은 뒤 부산에 있는 육군 통신기지창 등에서 기술 장교로 근무하다가 1963년 중령으로 예편, 파란만장했던 군인생활을 마감했다.

“돌아보면 우리 역사에서 이데올로기는 악마의 씨앗이었지. 일제 시대는 항일세력과 친일세력이 대립했고, 조국이 해방되자 국제정세 때문에 남북이 분단되어 동포끼리 원수가 됐어. 그 최악의 비극이 바로 6.25전쟁이었던 것이지”


“전장에서 목숨 구해준 은인 영전에 큰절이 소원”

포로수용소 탈출기 책으로 펴내
후세에 전쟁 실상 알리고파


 
↑↑ 윤정식 어르신이 빛 바랜 실종통지서를 다시 꺼내보며 옛 생각에 잠겨 있다.
ⓒ 양산시민신문 
“내 소원은 내가 포로가 되기 전 평안남도 덕천군 산속 토굴에 피신하던 중 도와주고 목숨까지 구해준 영감님의 묘소를 찾아 잔 올리고 향불을 피워 경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토굴 바닥에 묻어 둔 내 권총을 찾아 비록 녹슬었지만 내 손으로 힘껏 잡아보고 싶습니다”

윤정식 어르신에게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을 직접 겪은 어르신의 기억 속에서 전쟁은 여전히 생생하다. 북한의 실체를 제대로 알아야 하지만 안보의식이 약해지고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걱정이 앞선다. ‘비극’, ‘참혹’이라는 단어로는 표현하지 못할 상처를 알리고, 다시는 이런 일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윤 어르신은 지난 1998년 덕천포로수용소 탈출기 ‘두 번 하는 생일’이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이 책은 윤 어르신이 통신장교로 참전했다 포로가 된 이후 탈출했던 체험을 담고 있다. 집필 과정에서 전쟁 당시 중공군의 진군 루트였던 중국 단동을 5차례 방문하고, 육군본부 전사실을 16번이나 방문하는 등 철저한 자료 수집을 통해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윤 어르신은 “이제 전쟁을 겪은 사람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의 실상을 후세에 꼭 남겨야 한다는 주변 권유에 따라 책을 썼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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