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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살롱] 작은 '나'에서 벗어나 보다 큰 '우리'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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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살롱] 작은 '나'에서 벗어나 보다 큰 '우리'로

양산시민신문 기자 266호 입력 2009/02/03 11:36 수정 2009.02.03 11:43

유병철
양산대학 산업복지경영과 교수


요즈음 우리 이웃을 알고 지내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21세기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일수록 이웃을 알고 지내는 여유를 가진 사람이 드물어지고 있다. 사회적 환경의 변화가 현대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기적으로 변하게 한 일면도 없지 않을 것이다. 무한경쟁 사회구조 하에서 살다보니 이웃을 돌아 볼 기회가 많지 않게 되었으며 나 또한 자기 가족 중심의 생활태도에 젖어 들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사람 개개인은 천하의 유일한 존재이고 삼라만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소중하고 귀한 존재이다. 영어에서 '나'를 'I'라고 대문자로 표기함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온 천하를 다 주어도 나의 생명과 바꿀 수는 없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 내가 존재하지 않는 우주에 무슨 의미와 가치가 남아 있겠는가. 그래서 '나'는 우주의 중심인 존재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자기중심주의는 우리나라 'X세대' 혹은 '297세대' 등으로 다양하게 통칭되는 신세대 대학생들에게 있어서 지나치다고 아니 할 수 없다.
 
386세대와 475세대가 먹고 자는 걱정을 하면서 성장한 데 반해 이들은 이런 것들에 구애를 받지 않고 유년시절과 청년시절을 보내고 있다. 오히려 첨단 전자기기와 서구식 대중문화에 익숙하며 경제적 뒷받침이 되는 환경 하에서 자란 탓에 '자기중심적' 성향이 강하게 드러난다. 297세대에 속하는 신세대에는 더욱 심하게 나타날 수 있다. 이들은 끈끈한 '우리'보다는 가뿐한 '나'를 좋아하고, 더 나아가 '나'만 있고 '남'은 없는 자기애적 인격 장애자가 되어 버렸다.
 
누구나 나와 함께 있어 줄 사람만이 아니라 '내편'이 되어 줄 존재를 필요로 한다. 삶은 함께 살아가는 예술이므로 모든 사람은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서 내 존재의 가치와 의미를 살찌게 해 줄 그런 '너'를 필요로 한다.

실로 그런 '너'는 나에게 중요한 존재이어서 '나'와 '너'를 함께 묶을 때 영어에서는 '너'를 먼저 기술하여 'You and I'로 표기한다. '너'와 '내'가 합해지면 '우리'가 된다. 작은 '나'에서 벗어나 보다 큰 '우리'로 성숙하여야 한다. 가장 중요한 한 단어 가운데서 가장 나쁜 것이'나'이고 가장 좋은 것이 '우리'이다.
 
필요한 것은 자기의 것으로 만들려고 관심을 가지지만 필요 없는 것은 알려고도 하지 않는 무관심이 오늘날을 대변하는 사회의 속성이 되어 가고 있다. 지나친 이기주의와 무관심이 우리 사이에 크게 자리잡고 팽배해 질수록 예전까지 자기 스스로는 그렇지 않다고 하며 사회의 파수꾼으로 자처하던 사람들조차 부지불식간에 나쁜 습성에 동화되어 버리고 만다.
 
남에게 호의적이지 못한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 만큼은 얼마나 호의적인지를 가늠해 보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공공장소에서 남의 아이가 뛰어 놀면 부모의 가정교육이 잘못되었다고 나무라면서 자기 아이가 뛰어노는데 야단치는 사람이 있으면 왜 커가는 어린아이의 기를 죽이느냐고 항변하는 곳이 요즘 세태의 사람들이다.

남들 앞에 지식인이고 교양인인 척 하면서 뒤에서는 시정잡배들보다 더 지저분한 일들을 자행하고 있는 유명 인사들을 매스컴에서 만날 때마다 병든 사회의 한 모습을 본다고 하기보다는 외면하고 무관심해버리려고 하는 것이 또한 우리들의 모습이다.
 
좀 더 마음의 문을 열고 자신에게 관대했던 것처럼 남에게도 너그러운 마음을 베풀어야 한다. 내가 아닌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나아가 우리의 입장에서 이해의 폭을 넓혔을 때 우리는 이기주의와 무관심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우리의 작은 노력이 사회의 새로운 활력소로 나타날 수 있다는 신념이 있으면 안 될 일도 없다.
 
'우리' 속에는 다정다감한 정이 있다. 정이 들어야 '우리'가 된다. '우리 남편', '우리 학교', '우리 회사', '우리 나라'라는 말 속에는 하나 됨의 정이 듬뿍 담겨 있지 않은가?, '나'와 '너'가 소프라노와 알토가 되어 '우리'의 세계로 듀엣을 이룬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소리가 나겠는가. 작자도 제목도 없는 다음과 같은 글이 이 같은 세계를 잘 보여 주고 있다.

「너는 오고 나는 가는/길에서/ 나는 너를 보고/ 너는 나를 본다./ 나를 보는 네 눈동자에/ 내가 있고/ 너를 보는 내 마음에 네가 자리한다./ 내 안에 네가 있고/ 네 안에 내가 있다/ 내 안의 너와 네 안의 내가 만나는 길에/ 우리가 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솝우화에 나오는 눈이 둘 달린 원숭이가 제 몫의 역할을 하려는데, 눈이 하나 달린 원숭이들의 집단이 너무나 비대해져 시비를 가릴 수조차 없어지는 현실이 오기 전에 우리들은 스피노자의 사과나무를 심는데 참여할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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