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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석가탄신일 기념 수필] 순간 속의 영원..
오피니언

[석가탄신일 기념 수필] 순간 속의 영원

양산시민신문 기자 입력 2008/05/13 13:23 수정 2008.05.13 03:47

 
ⓒ 양산시민신문 
천년의 세월도 순간으로, 순간도 천년의 세월로 헤아리는 것이 부처님의 혜안이라 했던가. 있음이 곧 없음이요, 없음이 곧 있음이라는 가르침을 거울삼고 보면 천년이고 만년이고 다 일순간이 아닐 수 없으리라. 하물며 있음의 몸짓 지어 고작 70년이나 80년이라면 그 세월의 마디를 ‘무슨 순간’이라고 이름 지어야 하랴. 나를 위하여 세상 만상이 있는 게 아니라 나 하나도 세상 만상 중의 지극히 작은 일부임을 깨닫게 하고, 철없이 분별없는 본성의 교만이 행여 나만을 위하여 세상 만상이 있다고 착각할까 두려워 그게 아니라고, 그런 것이 아니라고 수수 만 번 쓰다듬으며 깨우쳐 비춰주고자 함이 부처의 고행의 의미였으리라. 가지고 있음도 부질없음이요, 누리고 있음도 부질없음이요, 얻고자함도 부질없음이요, 놓치지 않으려 함도 부질없음을 인식하되 실행하지 못하는 속인의 자리에서 부처의 도량은 영원한 빛의 원천일 수밖에 더 있으랴.

엊그제는 남편과 함께 절집엘 다녀왔다. 마침 일요일이었고, 남편의 생일이기도 했다. 함께 영화를 보러 갈까, 바닷바람이나 쐬고 올까, 궁리 끝에 절집으로 가 함께 심신을 맑게 하고 오자고 결론을 내렸다. 물론 나는 불교신자도 아니고 부처님 앞에 절을 올리는 예법도 잘 모른다. 그러나 이따금 절집에 들러 그 마당을 둘러보고 오면 마음이 참 평안해지는 느낌을 가졌던 것이 떠올랐던 것이다. 더욱이 남편의 생일인 만큼 그를 위해 부처님 앞에 기도를 올리고 오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집을 나서 차로 40여분 남짓 달리는 동안 역시 잘하였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채선(彩扇)을 비껴 든 듯 뭇요정들이 쏟아져 나온 춤판인 듯 복사꽃 살구꽃을 비롯한 오색가지 꽃들이 무늬진 아름다운 산과 들, 그 훈향은 또 다른 감동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산길로 접어들어 지나치는 시골마을은 인적이 드물고 고요하였다. 마을 이름이 백학이라 했던가. 마치 학이 그 날개를 접고 앉아 쉬고 있는 듯 세상 바람을 타지 않고 그러면서 햇볕 가득 쏟아지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시골마을의 풍경이다. 마을을 지나쳐 오솔길을 얼마쯤 더 더듬어 올라가자 학림사란 현판이 붙은 조그만 절집이 나타났다.

스님은 어디 가셨는지 섬돌 위에 고무신 몇 켤레만 깨끗이 닦여 놓여있을 뿐 고요하였다. 법당에 들어 서툰 모습으로 삼배를 하고 밖으로 나와 남편과 마당을 거닐며 절집을 구경한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절(?)이어서인지, 큰 법당 아래 보살이 거처하는 조그만 요사채와 그 옆에 최근에 만들어졌다는 큰스님의 사리탑이 우뚝 솟아 있을 뿐 아직 해우소도 만들어져 있지 않았다. 곧 부처님오신 날이 돌아오는데 그 흔한 연등하나 걸려 있지 않았다.

뽀얗게 먼지가 일며 차 한 대가 들어선다. 학림사 주지인 현범스님이시다. 스님은 속세에 있을 때 남편과 친구의 연을 맺었던 분이다. 그분이 어떤 사연을 가졌는지 잘은 모르지만 어느 해 홀연히 머리를 깎고 속세를 등졌다. 차에서 내린 스님이 마당을 가로질러 오시며 우리를 반갑게 맞으신다. 합장을 하며 인사를 나누고 스님 거처하는 요사채 방으로 들어가 뽕잎차 한 잔씩을 대접받는다. 방안의 정갈한 분위기 때문인지 남편과 나는 잠시 침묵의 무게에 눌린다.

한참이 지나 침묵을 깨며, 부처님오신 날이 다 되어 가는데, 왜 아직 연등을 달지 않았느냐, 이 절을 찾는 신도들은 없느냐고 여쭈었다. 그랬더니 등은 법당 안에만 달 것이고 밖에는 달지 않을 예정이라며, 찾아오는 신도들이 몇 있긴 하지만 그들에게 이 절의 신도가 되어달라고 굳이 청하진 않을 것이란다. 그러면 그들이 부담을 가지게 된다고, 절집은 그저 그들이 마음 내킬 때 언제든 와 마음 부려놓고 가게 하는 곳이라고, 자신의 임무는 그런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라고. 그러면서, 중이 신도를 모으는 데 혈안이 되고, 돈에 눈을 뜨게 되면 그 중은 그것으로 생명이 끝나는 것이라며, 이어 인연설에 대해 한참을 얘기 해 주신다. 뻔한 얘기, 귀에 익은 얘기지만, 스님께 들으니 세속의 때에 묻혀 지내 온 마음이 숙연해 진다.

한편으로는 아, 이 분은 정말 스님이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그 어떤 아픔과 서러움이 있었기에 이 깊은 산에 생의 한 자락 커튼을 내리고 불전에 귀의하게 되었을까, 또 그 삶의 빛은 어디쯤 조명하고 있는 것일까 싶은 생각도 든다.

이 땅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절이 있고, 그 절마다에는 남달리 속 깊은 사연들을 간직한 채 속세를 등진 승려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승려들 먼저 일찍이 깨달은 사람 부처가 있었고, 절은 그 부처님을 모시고 작게는 승려 자신의 깨달음에서 크게는 모든 중생들의 깨달음까지를 성취시키고자 하는 터인 것이다.

스스로 아직 경전공부에 열중하고 몸과 마음을 더 많이 수행해야 한다며 자신을 낮추시는 현범스님. 아직 나이도 그리 많지 않고, 더 많은 고행의 세월을 걸어야 하겠지만, 부디 그 초심 변치 않기를, 그리하여 온갖 영욕과 희비 청탁이 엇갈리고 뒤섞인 인간의 삶이 실로 한바탕의 꿈에 지나지 않음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일깨워주기를...

절집을 빠져 나오면서 왠지 수수러워지는 마음은 무슨 까닭일까. 무심히 바라본 하늘가에 떠 있는 구름에서 울컥 삶의 허망을 느끼듯 심산 사찰에 머물며, 사는 것에 헛됨을 느낀 탓이었을까. 그런 느낌과는 다르게 다시 삶의 자리로 돌아가야 하는 발길이 안타까워서일까. 길이 끝나는 자리에서 잠시 되돌아보니 바람에 송홧가루가 자욱하게 날리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뻐꾸기 울음소리가 고적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학림사 : 통도사의 말사 가운데 하나로 하북면 백록리에 있다.

김순아
시인. 한국문인협회 양산지부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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