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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는 재일동포 민족학교에서 직접 교육을 받은 연구자와 교육자, 그리고 이 문제에 관한 국내 연구자와 사회 활동가들이 참여하여 열띤 발표와 토론을 펼쳤다. 필자는 두번째 패널의 발표자와 종합토론 사회자로서 참여했다.
재일동포 2세 연구자로서 해방직후 고베에서 민족교육을 받은 재일동포 사학자 김경해 씨는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교육투쟁의 배경과 전개과정을 박진감 있게 설명했다. 그는 전쟁종결과 함께 대다수의 재일동포들이 한반도로 귀국해 가는 가운데 귀국에 앞선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여 천막 교실이나 노천 교실을 이용한 우리말 교육이 일본 전역에서 이루어졌다고 했다.
국내 연구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발표한 필자는 일본 이외의 지역에서 한인단체들이 재일동포의 교육투쟁을 어떻게 평가했는지 신문과 잡지 기사를 통해 소개했다. 미국과 중국대륙의 한인 단체, 남한의 군정당국과 과도정부, 그리고 남북한 정치단체는 교육투쟁 소식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했다.
필자는 당시 한반도에서 두개의 정권 수립이 기정사실화 되는 시점에서 각각의 단체가 정치적 성향에 따라 교육투쟁에 대한 평가를 각각 다르게 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어서 호남대학교 김태기 교수는 재일동포의 민족교육에 대한 점령당국의 태도를 비판적으로 검토했다.
그는 점령당국이 ‘조선인’학교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취한 이유로서 민족교육을 주도하는 조련(재일본조선인연맹)과 같은 단체가 공산주의에 경도되었을 뿐 아니라 일본정부를 통한 행정조치에 거역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점령당국이 초중등 민족학교의 교육내용에 공산주의 교육이 있다고 판단하지는 않았다는 점을 부연했다.
마지막으로 재일동포 교육자 김덕룡 씨가 발표했다. 그는 60년대 말부터 시작된 김일성 우상화 교육을 비판하면서도 재일조선학교가 민족적 문화재산이며 기본적인 민족적 보존시스템으로서 60여년간 그 사명을 떳떳하게 수행해 왔음을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 오늘날 일본의 정치적 상황과 사회 분위기 속에서 민족학교가 맞고 있는 위기적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민족학교와 학생 수의 감소, 파행적 운영 상황, 재일동포사회의 민족성 약화 등의 현황을 통계자료를 통해 소개하고 이러한 위기들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민족학교가 적극적으로 변신하는 노력을 보여야 한다고 했다.
그는 이제까지 재일동포의 민족교육운동이 민족적 구성체로서 이념규정을 전제로 한 해외국민(공민) 조직운동의 기본 핵에 귀속되어 왔다면, 향후에는 모국과 민족의식의 다극화라는 재일동포사회의 특성을 반영한 문화적 공동체로서 역할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학술회의에서는 순서에 따라 각각의 발표에 대한 토론이 이루어졌다. 또한 마지막 순서인 종합토론에서도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었다. 토론 가운데 주요 쟁점으로 떠오른 것을 필자 나름대로 정리하면 다음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러한 쟁점들을 분명히 밝히고 정립하는 일은 금후 관련 연구자들의 과제라고 생각된다.
첫째는, 1948년 4월 당시에 민족교육 내용에 있어서 과연 공산주의 이념교육이 없었는가 하는 점이다. 교과서나 정책자료 상에 나타나지 않는 공산주의 교육에 대해 점령당국이 왜 그토록 ‘혐의’를 품고 민족학교를 폐쇄하도록 했을까 하는 점이다.
둘째는, 민족교육 탄압에 대한 일본정부의 태도가 어떠했는가 하는 점이다. 점령당국의 강경한 태도에 순응하지 않을 수 없었기 입장 때문이었다는 견해와 일본정부 스스로가 재일동포의 민족교육에 대해 적극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는 견해가 대립하는 가운데, 어느 쪽 견해가 사실에 보다 더 가까운가 하는 점이다.
셋째는, 오늘날 일본사회에서 민족학교에 대한 적대감이 표출되고 있는 가운데, 조선학교 학생들에게 민족의상을 입도록 하는 조치가 바람직한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것은 일본사회에서 민족성을 나타내는 공간을 한정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가 하는 개별적 정체성 문제로 확대할 수 있는 문제다.
넷째는, 재일 민족학교 유지를 위한 지원에 있어서 한국 정부도 관여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다. 자칫 외교적 불협화음을 불러일으키기 쉬운 문제에 대해 정부가 ‘민족적’이라는 이유로 나서는 것이 바람직한가 하는 정책적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