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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다양한 방법으로 함께 꿈꾼 ‘대한독립’..
기획/특집

다양한 방법으로 함께 꿈꾼 ‘대한독립’

김민희 기자 minheek@ysnews.co.kr 입력 2016/06/14 10:53 수정 2016.06.21 10:53
■ 나라를 지킨 양산영웅을 찾아서…

살아 있는 모든 것에는 뿌리가 있다.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든 우리는 그 뿌리를 무시하고서는 살아갈 수 없다. 하지만 많은 이가 우리 뿌리를 잊고 산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우리의 뿌리, 선열들을 잊은 채 살아가고 있는 게 현실이다.



호국보훈의 달 6월을 맞아 나라를 지키기 위해 헌신한 양산 출신 선열을 소개한다. 이번에 소개할 주인공은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된 김상헌, 윤복이, 이석윤, 김철수, 서두성 선생이다.



만세운동, 군자금 모집에 뛰어든 승려
김상헌 선생


김상헌(金祥憲, 1893~1945) 선생은 동면 출신으로 어려서 동래 범어사에 출가해 범어사 지방학림 과정을 마치고 서울 불교 중앙학림으로 유학했다. 그는 유심회(만해 한용운 선생 지도 아래 민족사상 고취와 불교 연구를 목적으로 하는 모임)에 가입해 교리와 민족문제 연구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1919년 한용운 지시로 상경해 서울에서 독립선언문을 살포하는 등 3.1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3월 6일 범어사로 내려와 범어사 의거를 의논하고는 서울로 돌아갔다. 3.1운동에 가담했다가 상해로 망명한 신상완, 백성운 등이 서울로 돌아와서 해외 소식을 알리기 위한 신문 ‘혁신공보’를 발간하자 김상호와 함께 여러 지역으로 신문을 배포하고 정보 수집 활동했다.


김 선생은 신상완으로부터 국내 불교계 유력 인사를 상해로 보내달라는 밀지를 받고 상해 임시정부에 갔다가 안창호로부터 자금 모집과 전국의용승군 조직 등 밀령을 받고 국내로 돌아왔다. 이후 1920년 ‘철원애국단’에 가입해 함경남도와 강원도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아 안창호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 또한 ‘조선전도’ 5만분의 1 지도를 구입해 보내기도 했다.


이런 활동으로 1920년 일본경찰에 붙잡혀 보안법과 정치범죄처벌령 위반 등으로 징역 3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범어사로 돌아와 후진 양성에 힘쓰다 광복을 맞았다. 김 선생은 1963년 대통령표창, 1980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됐다.

농민조합원 지키려다 순국한
윤복이 선생


윤복이(尹福伊, 1844~1932) 선생은 양산면 출신으로 농업에 종사했다. 그러던 중 1931년 4월 4일 창립한 양산농민조합 조합원으로 가입해 일제 소작료 착취에 항거했다. 1932년 3월 양산농민조합에서 소작료 인하를 결의했으며 조합원 수백명이 행진하며 시위를 벌였다. 이에 일본경찰이 시위 군중을 해산하고 이기주 등 주동자 16명을 체포했다. 이들은 다음날인 17일 부산형무소로 이송될 예정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윤 선생은 농민조합 양산읍 연락책임자로서 조합원 300여명과 함께 양산경찰서를 습격했다. 조합원들이 구속자를 무조건 석방하라고 외치며 경찰서 안으로 진입하려 하자 경찰서장은 직접 실탄을 장전해 발사했다. 이때 윤 선생은 좌측견갑골에 총상을 입고 5시간 만에 타계했다. 윤 선생은 1986년 대통령표창을 받았으며,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수서됐다.

죽는 순간까지 독립운동에 힘쓴
이석윤 선생


이석윤(李錫允, 1899~1986) 선생은 하북면에서 태어나 함경남도 안변군 문산면 사기리 석왕사에서 승려생활을 하다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이 선생은 1919년 5월 신상완과 함께 독립선언문과 독립취지문을 배부했다. 이후 상해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상해에 있던 이종욱이 보내온 ‘대한승려연합회선언서’를 받고 강원도 건봉사 주지 이대연과 주승 정인목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해달라는 서한을 전달했다. 이 일로 이 선생은 일본경찰에 체포돼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1920년 4월부터는 ‘철원애국단’에 가입해 강원도 지방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다시 일본경찰에게 체포됐다.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아 옥살이를 한 후에도 전남 대전군에서 군자금 100원을 수납해 임시정부로 송금했으나, 이 일로 일본경찰에 체포됐다.


대전으로 압송되는 도중 기차에서 탈출했으나 능주에서 다시 체포돼 심한 고문을 받았다. 심한 고문과 기차에서 탈출했을 때 다쳐 폐질 상태로 지내면서도 독립운동가를 보호하고 사전 정보를 제공하는 등 독립운동을 진행했다.



정부에서는 이 선생 공훈을 기려 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됐다.

동경에서 ‘독립’을 외치다
김철수 선생


김철수(金喆壽, 1896~1977) 선생은 상북면 출신으로 부농 집안에 막내로 태어났다. 1913년 7월 일본 동경으로 유학길에 올랐으며 유학 중 재동경한국유학생학우회에 가입했고 신익희, 이광수, 장덕수, 최팔용, 윤현진, 송계백, 백관수 등과 두터운 친분을 맺었다.


1918년 김 선생은 ‘조선학회’란 비밀결사를 조직해 간사로 활동했으며 9월에는 유학생 100여명을 모아 비밀결사인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해 동경 2.8 독립선언 운동을 준비했다. 1919년 동경 2.8 독립선언 11명 대표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가 징역형 9개월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르고 출옥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양산으로 돌아온 후 1920년 7월 ‘양산청년회’ 창립을 주도해 초대회장으로 선출됐으며 같은 해 12월, 중앙 조선청년회 연합회 총회 상임위원 선출, 1923년 물산장려회 조직 등 다양한 활동에 참여했다. 1924년에는 최남선의 ‘시대일보’ 경제부장, 1928년 3월 신간회 양산지회 설립 준비위원과 검사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36년 일제 감시와 협박으로 더 이상 활동이 어려워지자 양산에서 은둔 생활을 했지만, 일본경찰은 그를 울산비행장 건설장에 강제징용으로 보내 노역을 시켰다.


해방 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경남본부에 참여했으며, 독립촉성국민회 경상남도 위원장을 맡았다. 1946년 자유민보사 사장으로 지냈으며 미군정 하에 있던 1946년 입법위원으로 위촉, 1947년 제2대 경상남도지사, 1949년 적십자사 경남지사 초대지사장, 1960년 자유당 경남도당 위원장을 역임했다. 이 선생은 1963년 대통령표창, 1980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됐다.

서병희 의병장과 함께 일제에 항거한
서두성 선생


서두성(徐斗成. 미상~1908) 선생은 상북면 좌삼 출신으로, 서병희 의병장 부하로 국내 의병활동을 펼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서 선생이 어떤 활동을 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는 많지 않다.


그러나 1908년 7월 31일 경상남도 황협 관찰사가 내부대신인 송병준에게 보고한 내용을 통해 1908년 양산군 일원에서 활동하던 서 선생이 의병활동 중 체포돼 같은 해 6월 13일 일본 수비대에 의해 상북면 대석리 원효암 중로 만세봉 부근에서 사살돼 순국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국가보훈처 포상 공적조서에는 서병희 의병장 아들이라고 기재돼 있으나 서병희 의병장은 아들이 없는 것으로 알려진 만큼, 서 선생은 서병희 의병장의 가까운 친척이거나 휘하 의병일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정부에서는 서 선생 공훈을 기려 2005년 국가보훈처 직권으로 건국훈장 애국장을 서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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