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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민신문

나라 구하려 한반도를 신출귀몰한 영웅..
기획/특집

나라 구하려 한반도를 신출귀몰한 영웅

김민희 기자 minheek@ysnews.co.kr 입력 2016/06/07 10:53 수정 2016.06.21 10:53
[호국보훈의 달 특집] 양산영웅을 찾아서… 서병희 의병장
빼앗긴 조국 되찾으려 한의사에서 의병장으로
게릴라 전투로 활약 죽는 순간까지 절의

살아 있는 모든 것에는 뿌리가 있다.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던 우리는 그 뿌리를 무시하고서는 살아갈 수 없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우리 뿌리를 잊고 산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이 나라의 뿌리, 선열들을 잊은 채 살아가고 있는 게 현실이다. 호국보훈의 달 6월을 맞아 나라를 지키기 위해 헌신한 양산 출신 선열을 소개한다. 그 주인공은 양산을 비롯해 전국을 누비며 항일독립운동에 힘쓴 서병희 의병장이다.



서병희(徐炳熙, 1867~1909) 의병장은 양산 출신 의병장으로 일제강점기 시절 항일 의병 활동을 활발히 펼쳤다.


서 의병장은 1867년 상북면 좌삼리 97번지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달성(達城)이고, 13세까지 향리에서 한학을 수학했다. 20세 되는 해부터 서울에서 4년간 한의학을 배우고 돌아와 35세인 1902년부터 향리에서 한의원을 경영했다.


서 의병장이 한의사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하게 된 것은 1905년, 일제가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해 우리 국권을 침탈하고 전국 각지에서 국권 회복을 위한 항일의병전쟁이 일어났을 때다.


그는 국운이 기우는 모습에 한탄해 1907년 2월 한의원을 접고 서울로 상경해 그해 10월 임진강과 한탄강 유역에서 활동하던 의병장 허위 휘하(장군의 통솔 아래 있는 진영)에 들어갔다.


그해 겨울 양주지역에서 전국 13도 창의군이 결성됐을 때 총대장 이인영 휘하에 군사장으로 허위가 발탁됐다. 1908년 1월, 창의군이 서울 진공작전을 개시하고 서병희는 허위의 의병 300명과 함께 선봉에 나가 싸웠지만, 일본군의 선제공격으로 작전은 실패했다.


서울 진공작전이 실패로 끝난 뒤 서 의병장은 허위로부터 영남으로 내려가 의병을 일으키라는 명을 받았다. 서 의병장은 해산된 전 대한제국 군인 51명을 인솔해 영남지역으로 잠입했다. 경북 경주군 산내면에 있는 아미산에 들어가 이곳에서 활동하던 윤정의와 합세해 거사를 위한 훈련에 돌입했다.

















↑↑ 달성 서씨 문중에서 상북면 좌삼리 향리에 세운 재실과 현재는 멸실돼 공터만 남은 서병희 생가터.
ⓒ 양산시민신문


독립해 독자적인 부대 갖추고는
양산 등 경상도 전역에서 활약




1908년 4월 윤정의 부대와 합동으로 울산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하고 이어 경주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했다. 6월 윤정의와 결별한 뒤 고향인 양산에서 독자적으로 활동했다. 하서면과 하북면 등지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을 벌였으며 특히 하북면 성천마을에 투숙한 일본상인을 습격해 참살하기도 했다.



같은 해 9월에는 경남 산청에서 활동하던 의병장 박동의 휘하에 들어가 박동의의 부장 이학로와 함께 산청 두량곡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해 큰 피해를 줬다.


1909년 3월, 서 의병장은 이학로 부대에서 독립해 독자적인 부대 편제를 갖췄다. 서 의병장의 부대는 50여명의 소규모 부대로, 유격전에 적합한 게릴라식 전투부대로 편제됐다.


서 의병장이 이끄는 부대는 양산, 울산, 경주, 산청, 합천, 함안, 창원, 진주, 의령, 고성 등 경상남도 전역을 무대로 활약했다. 모두 14차례에 걸쳐 일본수비대와 교전하면서 일본수비대원, 관공서, 일본상인, 친일파 등을 공격했다.


특히 1909년 5월, 함안군 군북시장에서 일본인을 응징하고 일본수비대와 경찰서에 각성을 촉구하는 격문을 보내기도 했다. 격문에는 일본제국주의 만행을 규탄하고 일본 침략에 대한 의병활동 정당성과 일본인 귀국을 촉구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7월에는 부하 30여명을 거느리고 칠원주재소를 습격해 순사 1명에게 중상을 입히고 군자금 800냥을 거뒀으며 9월에도 창원 양전의 부호 박진사로부터 군자금 30원을 거뒀다. 10월에는 부하 18명을 거느리고 진주 가좌면에서 재무주사를 처단하고, 12월 의령과 고성에서 일본상인을 사살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했다.


전국에서 의병대가 투쟁할 당시, 일제는 의병 섬멸을 위해 군경을 총동원해 추적했다. 그런 상황에도 서 의병장은 2여년간 게릴라식 유격전을 구사하는 등 비상한 전략으로 경남 일원에서 종횡무진 활동하며 일본군을 따돌리는 모습을 보였다.

















↑↑ 상북 좌삼에 있는 서병희 의병장 추모비.
ⓒ 양산시민신문
1909년 밀고로 일본순사에게 체포
죽음 앞에서도 대원들과의 절의 지켜




서 의병장은 1909년 11월, 함안군 칠원면 부곡리 민가에 화승총 10정, 양총 2정, 권총 1정, 도(刀) 1진, 의류 등을 숨겨놓고 상인으로 변장해 혼자 세정을 파악하려 김해군 한림면 유림정으로 향했다.



그 사이에 일본군 수비대에 의해 숨겨둔 장비는 압수되고, 부하 3명이 체포됐다. 이를 모르고 창원부 내서면 사율리로 은신해 어물상을 계획하던 중 밀고로 12월 구마산 주재소 순사에게 체포됐다. 서 의병장은 의령지구 수비대장에게 인계돼 취조를 받았으며 향년 43세로 순국했다.


서 의병장은 체포된 후에도 대원들과의 의리를 끝까지 지키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붙잡히는 날에 대비해 기록지에 주소와 성 씨를 제외한 이름만 적는 등 대원들 신상을 제대로 기록하지 않았다. 취조 과정에서도 대원들 주소와 은신처를 묻자 “잘 모른다, 빨리 죽여 달라”며 끝까지 대원들 신분을 밝히지 않았다고 한다.


서 의병장은 국권 상실을 끝까지 막기 위해 의병활동을 했던 공로를 인정받아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됐다. 이후 2008년 달성 서씨 문중에서 서 의병장 생가터 인근에 재실을 건립해 위패를 모셨다. 또 그 광장에 서 의병장 추모비를 건립했다. 2009년 양산항일독립운동기념탑에 그의 이름과 상훈을 기록했으며 충렬사에도 위패를 모시고 해마다 제향을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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