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5일까지 경북 영덕군 일원에서 제1회 한국중등축구연맹회장배 U-14 권역별 축구대회가 열렸다.
전국을 5개 권역(서울, 경기, 동군, 서군, 경북)으로 나눠 펼쳐진 이번 대회에서 동군 U-14 선발팀이 전승을 거두고 우승을 차지했다. 동군을 우승으로 이끌고 대회 최우수 감독에 오른 사람은 양산중학교 축구부 최건택 감독이었다.
양산 물금읍 범어리에서 태어난 최 감독은 어린시절부터 타고난 운동신경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양산중학교에 진학한 뒤에도 소년체전 경남 육상 대표에 선발될 만큼 뛰어난 실력을 보였다. 그렇게 육상 국가대표를 꿈꾸던 소년에게 축구는 운명처럼 찾아왔다.
육상 대회를 앞두고 찾은 훈련장에서 당시 동래고 축구부 감독이었던 김호 감독을 만난 것. 김호 감독은 최건택의 재능을 한눈에 알아봤다. 이후 김호 감독의 끈질긴 구애가 시작됐다.
“당시 육상에 전념하고 있을 때라 축구에 큰 관심은 없었어요. 계속 육상을 하려고 했는데 김호 감독님은 절 포기하지 않으셨어요. 저도 마음을 바꿔 먹었죠”
다른 친구들보다 늦게 시작한 축구였지만 재능은 금세 꽃을 피웠다. 이러한 재능은 아이러니하게 최 감독의 발목을 잡았다. 김호 감독을 따라 부산 동래고에 진학하고자 했던 계획이 틀어진 것. 당시 축구 유망주로 이름을 알리던 최 감독을 경남은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결국 최 감독은 경남 마산공고 축구부에 진학한다.
마산공고에서 최 감독은 그야말로 부동의 에이스였다. 그의 활약에 마산공고는 출전하는 대회마다 우승 행진을 이어갔다. 주요 일간지에도 연일 이름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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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중앙대에는 운동부 선수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는 사례가 없었어요. 그런데 그때 저 혼자 장학금을 받은 거죠. 제 동기가 허재였는데 허재도 장학금을 못 받았거든요. 제 인기가 실감이 나나요?”
중앙대 최건택은 매 경기 거침없었다. 신입생 때 대학팀과 실업팀, 프로팀이 모두 참가하는 왕중왕 전에서 7골로 대회 득점왕을 차지했다. 85년에는 춘계 대학축구대회 결승전에서 결승골을 넣어 중앙대를 왕좌에 이끌기도 했다.
그렇게 최정상을 달리던 중 위기가 찾아왔다. 오른쪽 허벅지 인대가 끊어지는 큰 부상을 당한 것. 그러나 끊임없는 재활로 이를 이겨낸 최 감독은 이듬해 88년 올림픽 국가대표에 발탁됐다. 그리고 그해 드디어 김호 감독이 이끄는 울산현대프로축구단에 입단한다.
그러나 부상의 여파는 강했다. 부상의 고통은 갈수록 커져갔고 실력은 정체돼갔다. 최감독은 떠나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을 직감했다. 결국 프로입단 4년만에 선수생활을 정리하고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 이후 고향에 내려와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고 있던 저에게 양산중학교에 축구부가 생기니 감독으로 와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어요. 그때 저도 저를 축구계로 이끈 김호 감독님처럼 지역의 인재들을 발굴해 키워보고 싶단 생각에 흔쾌히 감독직을 수락했어요”
선수시절 최고의 자리에 있었던 최 감독은 지도자로서도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양산중학교는 최 감독이 부임한 이후 3년만에 전국대회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최 감독이 양산중학교 감독을 맡은지도 어언 9년. 최감독의 마지막 목표는 소년체전 우승. 그리고 양산지역 고등학교 축구부 창단이다.
“지금까지 양산중학교에서 거의 모든 것을 이뤘는데 아직 소년체전 우승을 못해봤어요. 양산중학교에서 꼭 소년체전을 우승하고 고교팀으로 진출해야죠”
자신감 섞인 그의 목소리에서 양산중과 최 감독의 앞으로의 행보에 기대감이 서렸다.